[이병초의 시비평 몽당연필] 6.날렵한 언어의 섬광 -이봉명의 ‘자작나무 숲에서’ 서평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승인 2023.05.30 14:46
햇살을 되받아치는 콩잎이며 오이순이며 노랑나비의 날개엔 어떤 계절이 녹아있을까. 몸으로 먼저 시를 쓰고 나서 붓을 들었을 이봉명의 시편들, 무욕의 시학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해맑다. 그의 시집 『자작나무 숲에서』(두엄, 2022. 11.)는 식물성이 눈길을 끈다.
누군가를 기억하듯 “밤길 더듬어 도주한 밭길에 민들레꽃”(「민들레꽃」)이 피고, “배고파 울던 시집간 큰누나 같”(「꽃며느리밥풀꽃」)이 꽃은 핀다. 적상산의 그늘을 입은 듯 “너처럼 쉽게 상처받지 않”(「질경이」)기 위해서 깨알같이 질경이꽃은 피고 이 향연에 「패랭이꽃」이며 「홀아비꽃대」며 「배롱꽃」, 「호박꽃」, 「제비꽃」, 「찔레꽃」 등등도 한 손 거든다. 이런 꽃피워냄을 지나서 가을비가 내리기도 한다.
가재 물 짐작하듯 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듯 비 내린다
값싼 갈치자반 올려 아침상 밀어 놓으면
같은 떡도 맏며느리 주는 떡이 더 크다고
개구리 낯짝에 물 붓듯 비는 내린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어느 시러베 아들놈 어깃장 놓듯
거미 새끼 풍기듯 비는 내리고
-「가을비」, 부분.
간과 쓸개, 낯짝, 개똥밭에 굴러도, 어깃장 놓듯 등등의 익숙한 입말과 속담에 어린 해학적 마주침이 유쾌하다. 특히 1행에 적힌 시의 언술은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장을 활짝 열어젖힌 것 같다. 햐, 가재가 물기 짐작하듯 비가 내리다니.
가을비가 소슬소슬 내리다가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듯이” 굵어지다가 급기야 “개구리 낯짝에 물 붓듯” 쏟아진다. 그러나 몇 발짝도 못 가서 “거미 새끼 풍기듯” 가을비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새끼 거미들이 모여 있다가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풍기듯’이라는 한 단어로 내보인 언어 감각이 놀랍다. “어느 시러베 아들놈 어깃장 놓듯”이란 시행에 눈길이 간다. 가을비가 좀 더 쏟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시러베 아들놈이란 욕으로 변주되어 튀어나왔을 이 시구는, 지지리 못난 이 세상과 기득권 세력의 마름으로 전락한 일부 지식인들을 싸잡아버린 풍자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전북 무주군 적상산의 품에서 꿀벌을 치는 이봉명 시인, 그는 언젠가 시를 얘기하다가 “어떤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시를 쓰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니야?”라고 내게 뜻을 밝힌 적이 있다. 이런 자존심을 먹고 사는 시편들이어서 그럴까. 『자작나무 숲에서』에 수록된 시편들에는 문명적 징후에 눌린 강박이나 지루한 산문적 진술은 없다. 이미지에 포획된 날렵한 언어의 섬광, 꿈의 씨앗에서 촉발된 쌉싸름하고 조촐한 식물성의 미학이 시편들 곳곳에서 숨을 바로 한다. <完>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도민일보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6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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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10:34:0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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