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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 1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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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 1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02.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



<1>

이영남 장군(1571-1598), 그는 전주가 고향인 전의인(全義人)이었다. 조선 땅의 명문가로 알려진 전의 이씨(全義李氏)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의 가문에서는 문과 급제자도 많았지만 무과 급제자도 많았다. 이런 영향인지 그의 관심은 무(武)에 있었다. 사서오경에 문리(文理)가 트여 한세상을 풍미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기질은 무(武)의 기질이 강했다.

이영남은 통천 김씨, 남계 김진(金瑱)에게 예학(禮學)을 배웠다. 그는 명종 7년 식년시에 생원 합격을 했고 1574년 합천교도(陜川敎導)를 마친 후 낙향하여 남계정(南溪亭)을 세웠다. 남계정 서문은 전라도 관찰사 신응시가 썼는데, “공은 문장뿐 아니라 성리학에도 일세(一世)의 으뜸이 되는 선비요, 시서와 예의를 실천하여 그 기상이 강상풍월과 같으니 어찌 훌륭한 스승이 아니랴.”라는 편액을 남겼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했던 조헌(趙憲)은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움을 닦았으니 일신(一身)의 생활 법도나 그 예의(禮義) 바름은 말할 것도 없고, 이학(理學) 일반과학 성리학에도 밝았으며, 과연 이 나라에 으뜸가는 문장 도덕인(文章道德人)”이라고 적었다. 의병장 고경명도 “옛날에 진북계(陳北溪)가 있더니 이제 김남계(金南溪)가 있도다. 학문의 높음과 교육의 바름은 가히 내세에 유전할 일이다”라고 편액을 남겼다.

김진은 문과 대과를 준비하는 선비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남계정을 찾는 유학자들과 성리학을 논하는 것에 시간을 더 할애했다. 당대의 학자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았다. 김진은 문리(文理)가 뭔지 아직 잘 모르는 학동들에게 예학을 강하기도 했다. 예(禮)의 본질을 이해하고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었고 성리학의 기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 이영남도 참석해 있었다. 김진은 영남의 아버지 정효와 친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구이면 일대에 뿌리를 내린 전의 이씨 집안과도 돈독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영남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이정효(李貞孝)는 말했다.

“네가 무예를 닦는 데 힘을 쏟는다고 하니 말하겠다. 조선이 중국의 속국은 아니지만 많은 문물을 중국에서 따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쟁의 악습까지 배울 필요는 없다. 전쟁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의로운 전쟁은 없다. 수천수만의 사람을 학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는 게 전쟁이기 때문이다. 몇몇 용맹스러운 장군의 승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일반 병사의 떼죽음과 패전국에 들이닥친 참담한 슬픔과 거기에 필연적으로 딸리는 백성들의 굶주림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참된 무인(武人)이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아군이든 적군이든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고통받는 사람은 다시 백성이다. 네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무예를 익히든 이 점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영남은 아버지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예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영남에게 모악산인(母岳山人) 김철을 소개해줬다. 사람들은 그를 도인이라고 불렀다. 나이를 알 수 없었고 그의 도량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사람을 대함에 차별이 없었고 사람을 살게 하는 ‘살림’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고 들었다.

모악산인 김철,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는 중종 재위기에 전주부 소양면 화심리에 있는 동래 정씨 집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동래 정씨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시집온 지 여섯 달 만에 그를 출산했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것이 아니냐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칠삭둥이나 팔삭둥이가 있는데 육삭둥이는 없겠냐면서 정씨는 그를 자식으로 거두었다. 하여 그의 별칭이 하성부지(何姓不知)였다. 기왕에 거둔 아이라면 어찌 성씨를 캐물을 수 있으랴, 이런 내색을 하지 않고 키우는 게 어른의 도리라고 정씨 아버지는 생각했을 것이었다.

하성부지는 점점 커감에 따라 자신이 집안의 사람들과 겉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꺼리는 게 분명하다는 낌새를 밥에 섞인 뉘처럼 골라냈다. 결국 하성부지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말았다. 어머니가 시집와서 여섯 달 만에 얻은 자식이 자신이라니. 자신의 성(姓)이 동래 정씨가 아님을 앎과 동시에 자신이 무슨 성씨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고통을 짊어진 셈이었다. 하성부지는 정씨를 뵙고 즉 양아버지를 뵙고 집을 떠났다.

그는 모악산으로 들어갔다. 모악산의 이름은 여럿이었다. 예로부터 이 산을 엄뫼라고 불렸으니, 산의 꼭대기에 어머니가 자식을 꼭 끌어안은 형상을 한 바위가 있으므로 모악산(母岳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산의 이름은 더 있었다. 전주나 구이에서 바라보면 산의 형상이 큰 물고기의 귀와 같다고 해서 어이산(魚耳山)이라고 불렀고, 김제(金堤) 쪽에서는 금산(金山)이라고 불렀으며, 구이면(九耳面) 일대에 사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산이라고 해서 이산(李山)이라고도 불렀다.

산에 들어온 하성부지는 대원사의 불목하니가 되었다. 부지런히 일했고 부지런히 무예를 닦았으며 부지런히 불경을 읽었다. 절에 오가는 선비들에게서 공맹의 도를 배우고 익혔다. 모악산을 훑고 다니는 지관들에게 묏자리를 잡는 법도 배웠다. 삶이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어떤 형상을 띠어야 옳은가. 어떻게 사는 게 참답게 사는 것인가,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깨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사서오경 깨쳤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예가 고수의 경지에 들었다고 할지라도 삶과 인간의 관계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결론지을 수는 없었다.

하성부지는 홀로 살았다. 스님이 아님에도 승복을 입고 다녔고 끼닛거리가 떨어지면 동네로 내려와서 바가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삶에 대한 허기는 더해갔다.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면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걸었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너그럽게 대했다. 오죽하면 저렇겠냐고 혀를 차면서 그에게 양식을 퍼주고 술을 대접했다. 그러나 이런 호사는 하성부지를 됫박한량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갈수록 그는 미륵불이라고 자칭하는 안하무인이 되어갔고 곧잘 동네 사람들과 멱살잡이까지 했다. 보다 못한 동네 청년들이 술에 잔뜩 취한 그를 꽁꽁 묶어 소나무에 대롱대롱 매달아버렸다.

이를 본 사람이 전의인(全義人) 이세충이었다. 강진 현감이었던 이세충은 아버지의 묏자리를 물색하러 다니다가 이런 광경을 보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듣고 몰골이 말이 아닌 하성부지를 풀어줬다. 모악산 일대에서 도인으로까지 알려졌던 그가 하루아침에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었다. 하성부지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더니 어떤 연유로 여기를 왔냐고 물었다. 이세충은 술은 좀 깼냐고,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물으려다가 아버지 묏자리를 찾으러 모악산에 들어가려다가 소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당신을 보았다고 말했다.

“아, 그렇소이까. 묏자리라, 그렇다면 잘 되었소. 내가 짚어둔 데가 있으니. 그런데 말이오, 그 자리가 이 근동은 물론 전라도에서는 제일 좋은 묏자리이긴 하오만 심각한 문제가 있다오.”

“그 심각한 문제라는 게 무엇이오?”

하성부지가 말에 뜸을 들였다. 자신의 마음속에 감춰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묏바람이 잘 불면 집안이 번성한다지만 묏바람이 잘못 불면 집안이 절구난다고들 하지 않던가. 차라리 이런저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평범한 곳에 묏자리를 잡아주는 게 좋지 않을까, 어쩌자고 묏자리가 가진 문제까지 들먹였단 말인가. 자신을 자책하듯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한참 더 눈을 꿈벅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묏자리에 조상을 모시면 집안은 번성하고 훌륭한 인재도 많이 나올 터이지만 그 집안의 큰자식에게는 자손이 없는 자리라오.”

“큰자식에게 자손이 없다?”

이 말은 이세충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전의 이씨 집안의 맏아들이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자식이 없을 거라는 하성부지의 말이 유쾌할 리는 없었다.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냈고 자신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강진 현감에 있으므로 뭐 한 개 빠지는 게 없는 양반이 자신이었다. 그런데 자식이 없다니. 하필 그런 자리에 아버지를 모셔야 하는지 난감했다. 그러나 이세충은 동생들을 생각했다. 동생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난다면 그들 또한 자신의 자식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희생해서 집안이 번성해질 수 있다면 아버지 묏자리를 하성부지가 말한 자리에 안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걱정은 말고 당신이 짚어둔 그 묏자리가 어디에 있소. 내가 사실은 장손이오만, 동생이 여럿이니 거기서 태어난 손들이 훌륭하게만 된다면 나는 자식이 없어도 괜찮소. 더구나 나는 사실 묏자리에 관계된 풍수 사상은 잘 믿지 않는 편이오. 남들이 보기에도 참 좋은 곳, 바람 잘 들고 햇살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면 좋은 묏자리 아니겠소. 조상을 모시려고 땅을 팠는데 거기가 물구덩이일 때 그런 곳에 조상을 모실 후손이 있겠는가 말이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니 괘념치 마시오.”

“아, 그렇소이까. 정말로 당신은 자식이 없어도 후회하지 않겠소이까.”

“그런 걱정은 마시오. 내가 희생해서 집안이 번성한다면 조상님들께 그보다 더한 효가 어디 있겠소.”

하성부지는 이세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하는 본새가 일반 양반은 아닌 듯했다. 자신을 버리고 집안의 번성을 얻는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삶이 있으므로 타인의 삶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지식인이었다. 뭐든 자신의 삶이 우선이므로 지식인은 곧 이기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터에 자신을 희생하겠다? 하성부지는 이세충이 대답을 듣고 귀가 트인 듯했다. 이세충의 마음 씀씀이는 제 집안의 일로만 한정되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성부지는 문득 이세충의 묏자리도 잡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 아버지 묏자리는 나를 따라가면 알 것이오. 그리고 내가 무자손천년향수지지의 자리를 잡아둘 터이니 가기에는 당신의 묘를 쓰도록 하시오.”

자손은 없으나 향촉이 천 년 동안 끊어지지 않는 묏자리라, 그런 묏자리도 있단 말인가. 이세충은 자신의 묏자리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묏자리를 잘 써서 후손이 출세했다는 말도 그다지 믿지 않았다. 자신이 이룬 학문적 업적과 언행에서 출세 길이 트이는 것이지 조상의 묏자리에서 출세 길이 트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시일이 얼마 지난 후 이세충은 하성부지가 짚어둔 자리에 예조좌랑을 지낸 아버지 이창수를 모셨다. 거기가 모악산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서 있는 장파동이었다.

묏자리를 잘 쓴 덕분이었을까. 훗날 이세충의 동생 효충이 문과에 급제했고, 그의 아들 승효가 문과에 급제했으며, 그의 손자 정란도 문과에 급제했다. 전의 이씨 문중에서는 하성부지가 보통 인물일 수 없었다. 도인이라더니 그 말이 맞다, 그는 우리 집안에 천복을 내려줬다, 전의 이씨 문중 사람들은 하성부지를 만나면 조상을 뵙는 것처럼 그에게 공손했다. 이창수로부터 내리 4대가 문과 대과에 급제했으니 이는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더 먼 훗날 이세충의 묘를 흑석골에 썼다. 문중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음은 물론 흑석골 이세충의 묘에 정성을 들이면 장사가 잘된다는 소문이 났는지 전주부에서 장사하는 이들이 하루 멀다고 찾아와서 향촉을 올렸다. 하성부지가 예언한 “무자손천년향수지지”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세충은 자손이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이 묏자리를 잡아준 하성부지가 모악산인(母岳山人) 김철이었다. 전의 이씨 집안과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었던 것이었다. 장파동에 모신 이창수가 정효의 조부이니 영남에게는 증조부였고, 이세충은 정효의 백부(伯父)이니 영남에게는 할아버지뻘이었다. 영남은 당시 아버지 정효가 왜 모악산인 김철을 소개해줬는지 몰랐다. 영남 자신이 전의 이씨라는 것은 알았지만 모악산인인 스승님과 집안에 어떤 일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영남은 전주성에서 과히 멀지 않은 구이면(龜耳面)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에 모악산(母岳山)이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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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북포스트 http://m.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52






[2022-04-18 08:19:29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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