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洋의 홈



2.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 2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작성자 : 김경운 
파일1 : baram379_1650866757_01.jpg (135.1 KB)





2.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 2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기사승인 2022.04.25  10:20:52


-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02.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

<2>

영남은 산의 터줏대감이라고 알려진 모악산인(母岳山人) 김철에게 무예를 익혔다. 대원사를 한참 못 미쳐서 오른쪽으로 한참을 굽이굽이 들어가면 문득 펑퍼짐한 곳이 나오는데 거기에 스승의 움막이 있었다. 큰 바위들이 오롯하게 막아선 곳이었다. 영남은 대원사와 수왕사와 그 너머에 금산사를 품고 있는 모악산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오르내리며 체력을 단련했다. 종아리에 모래주머니를 단 채였다. 나이가 몇인지 누구에게서 무예를 익혔는지를 알 길이 없는 백발의 모악산인은 영남의 몸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는지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 일 주일 동안은 발동작, 걷는 연습, 밀어걷기만 배웠다. 다음 3개월 동안은 머리치기, 손목치기, 허리치기를 배웠다. 모악산인은 한 동작 한 동작이 튼실하게 자리잡기까지 정확한 자세, 정확하게 칼 쓰는 법을 가르치는 데 전력했다. 스승은 흐트러지는 자세를 용납하지 않았다. 기본기가 튼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쳤다. 모악산인의 목검은 수시로 이영남의 어깨며 허벅지 옆구리 등을 파고들었다. 적에게 빈틈을 내주는 순간 자신의 목숨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법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모악산인은 말했다. 자신의 체력을 철저하게 밑바탕 삼은 검술 무예 그것은 첫 번째로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요, 둘째는 이타적(利他的)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타인 즉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칼을 쓰되, 검(劍)을 뽑았을 때는 자신이 검 뒤에 숨을 것, 불가피하게 목숨을 취할 때는 죽음의 고통을 가장 짧게 하는 방법을 써야 할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칼을 뽑는다. 이 칼은 나를 지키고 상대를 제압하는 칼이다. 칼을 뽑고 맨 처음 하는 자세는 중단세, 이 자세는 자연체에 가까운 자세다. 하지만 오랜 수행의 시간을 거쳐야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자세를 얻을 수 있다.

상대와 맞서보면 상대의 품격과 깊이를 알 수 있고 수련이 덜된 사람은 빈틈이 보인다. 중단세에서 뻗은 검선은 나의 칼끝을 지나 상대의 칼끝을 건너 상대의 목과 인중 사이를 노리는 데 미세한 움직임도 없다. 칼자루를 쥔 왼손과 오른손은 수건을 약간 쥐어짜듯이 감싸며 조여주어야 한다. 앞발은 조용히 접근해 가는 호랑이처럼 약간 구부린 형태를 유지하고 뒷다리는 언제라도 땅을 박차고 나가겠다는 듯 힘의 균형을 유지한 채다.”

이영남은 모악산인의 중단세를 무수히 보아왔다. 어느 한군데 빈틈이 없었다. 그 앞에 발검하고 중단세를 취한 후 공격 연습을 할 때면 꼭 무슨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스승의 그림자만 따르는데 3년여 시간이 지나갔다.

이 과정에 활이 빠질 수 없었다. 무과시험을 치르고자 하는 자에겐 활이 필수였다. 서서 쏘는 활, 뛰면서 쏘는 활, 말을 달리면서 쏘는 활. 비정비팔 흉허복실이라고 했던가. 즉 발의 위치는 정(丁)자도 아니고 팔(八)자도 아닌 자세로 서서, 즉 과녁을 향해서 보통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걸음새로 서서 복식호흡을 했다. 전추태산 발여호미(前推泰山 發如虎尾)- 활을 쥔 손은 태산을 밀듯이 묵묵히 앞으로 밀고, 시위를 놓을 때는 호랑이 꼬리를 떨치듯이 부드러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화살이 목표물에 적중(的中)하려면 힘과 유연성이 조화로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악산인은 이영남에게 혹독했다. 하루의 수련이 끝나면 고요히 묵상하는 시간이 왔다. 그 침묵의 시간을 자신의 몸에 바짝 붙일 수 있을 때 활을 쏘는 자의 첫 번째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임을 강조했다.

모든 무예가 그렇지만 활은 침착을 더 요구했다. 호흡이 잠깐만 비껴도 화살은 엉뚱한 곳에 박히기 때문이었다. 활을 서서 쏘든 말을 달리면서 쏘든 여기엔 태산과 같은 무게 중심이 먼저 잡혀 있어야 했다. 침착함과 집중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영남은 전투 중에 적을 가장 많이 살상하는 무기가 왜 활인지를 깊게 생각했다. 집중력을 가진 침착성, 이것이 없는 화살을 맞고 패퇴될 적은 없었다.

모악산인은 이영남에게 편전에 관한 얘기를 꺼내 들었다. 전투에서 적에게 조선의 힘을 무섭게 보여줬던 병기는 편전(片箭)이라는 것이었다. 일반 화살을 몇 개로 나눠서 쏘았던 활이 편전인데, 화살의 크기가 하도 작아서 속칭 ‘애깃살〔童箭〕’이라고도 불렀다. 문제는 화살의 길이가 너무 짧아서 활줄에 걸어서 시위를 잡아당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편전의 강력한 파괴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통아(桶兒)’를 만들어 쏘았다. 일반 화살은 길어서 날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200보 정도에서는 화살을 피할 수도 있었다. 편전은 달랐다. 최대 사거리가 1,000보에 육박했고 길이가 짧고 작아서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적에게는 치명적인 무기로 인식되었다.

모악산인의 가르침에 따라 몸에 있는 급소들이 차차 이영남의 뼈와 살이 되어 갔다. 영남의 검술 실력이 늘자 스승은 정중동(靜中動)이란 말을 자주 하였다, 상대와 맞서는 중단세 속에는 깊은 뜻이 있음을 가르쳐주곤 했다. 이 자세는 멈춰 있는 듯하나 상대를 내 눈빛과 내 자세로 제압하고 칼끝은 이미 상대의 칼끝 중앙을 빼앗아 기백으로 상대의 빈틈을 흐트려놓은 후 언제든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 듯하나 이미 움직이고 있는 상태였다. 일족일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적의 칼과 마주하는 자세이기도 했다.

기초연습이 몸에 익을 무렵 스승은 연격을 가르쳤고 매일같이 공격 연습을 시켰다. 연습은 곧 실전이었다. 모악산인은 중단세로 검을 쥐고서 공격 연습을 시켰다. 영남은 스승의 빈틈을 찾아 연속적으로 공격 연습을, 짧은 시간 단위로 끊어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승의 검선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중심선을 빼앗았다고 생각하여 머리를 공격했지만 스승의 칼은 어느새 허리를 치고 들어왔다. 손목과 머리 연속공격은 공격과 속도를 키워주는 검술훈련이었다. 공격에 속도가 붙으면 한 호흡으로 손과 발이 동시에 움직이면서 한 박자에 손목과 팔동작이 칼을 쓰는 행위에 한몸이 되는 동작이었다. 이영남은 서서히 검술 무예의 이치를 깨달아갔다. 빠름과 기세와 기회가 그것이었다.

몸이 지치면 숨이 거칠어지고 저절로 침이 뱉어졌다. 그보다 더 지치면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이영남은 입에서 거품이 나올 때까지 목검을 쥐고 모악산인의 가르침을 따랐다. 어떤 상대가 자신의 적으로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대의 검법이 자신이 수련한 검법보다 몇 수 위일 때도 있을 것이었다. 그때를 대비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수련은 혹독했고 모악산인의 목검에 얻어터진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저렸다. 그러나 기본기를 토대로 익힌 검법은 자신을 살리고 타인을 살리는 활인술(活人術)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검법 수련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칼을 쓰는 고수일수록 왜 칼을 귀하게 여기며 어째서 칼을 쉽게 뽑지 않는지 그리고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깨칠 수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승리는 칼을 뽑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예 수련의 길은 험난했다. 스승의 목검은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지는 고통이 활의 수련이었다. 숨을 고르고 호랑이 꼬리를 감아쥐듯이 화살 꽁지를 말아서 쏘았는데도 화살은 번번이 다른 데 박혔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냐는 스승의 호된 질책이 번번이 날아왔다. 이른바 18반 무예며 창술(槍術)은 이영남에게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묻는 것 같았다.

여기에 글공부도 빠지지 않았다. 무과를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병서를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육도와 삼략, 손자와 오자의 병법서를 읽었다.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이 싸워서 이기는 법을 서술한 것이라면, 육도와 삼략은 부하들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싸워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수에겐 부하들을 제대로 통솔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영남은 특히 손자병법 모공편에 적힌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는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글자 그대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이 문장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대충 이해하고 있는 흔한 문장이었다. 이에 대해서 스승은 이 문장의 속뜻은 싸워서 이기면 하책(下策)이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먼저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라. 그리고 적에 대해서 고찰하고 적진을 끊임없이 살피고 간자(間者)를 통해 적의 전력을 알아보게 하라. 전쟁의 첫 번째 승패는 여기에서 판가름이 난다.”

스승의 가르침과 글줄은 이영남의 생각 주머니를 마음껏 넓혀 놓았다. 무인(武人)으로 살겠다는 뜻은 의로운 삶을 살겠다는 선언과 다름이 없었다. 의로운 삶은 먼 데 있지 않았다. 이웃 즉 타인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는 거기에 의로운 삶은 있었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는 제 뜻을 내세우거나 강요가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뜻이 저절로 드러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갈수록 모질어지고 야박해졌다. 묵자(墨子)의 글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기는커녕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며,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사회 풍토가 되고 말았다. 묵자는 겸애설(兼愛說)이 진리라고 주장했다. 묵자는 타인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기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를 바랐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기 때문이었다. 유가(儒家)에서 지적한 것처럼 겸애설이 관념적 이상주의일지라도 이영남은 묵자의 평등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16세기의 조선 백성은 수취 체제의 문란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자영농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기 일쑤였고 여기에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라는 게 백성의 숨통을 조였다. 공납의 폐단인 방납(防納)이며, 군역의 폐단인 방군수포제( 放軍收布制) 등등 때문에 백성은 야반도주하기도 했다. 경제 현실의 폐해를 백성이 뒤집어쓴 것이었다. 급기야 임꺽정의 난(1559-1562)까지 일어나지 않았던가.

여기에 사회를 이끄는 지식층이라고 자칭하는 일부 선비들의 오늘은 거 가관이었다. 필설로 성현의 해타(咳唾)를 들먹이며 온갖 옳은 말을 하는 것 같아도 속을 뜯어보면 조선팔도를 어지럽히는 기득권 세력에 기생하는 꼴값들을 하고 있지 않던가 말이다.

이영남이 생각하고 있는 고민의 답은 늘 사회 안에 있었다. 만백성을 위한 나라의 정책은 별반 찾아볼 수 없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일부 양반과 일부 정치인의 경제적 풍요로움 유지해주기 위해서, 그네들의 정치생명력을 연장시켜 주기 위해서 더러 국가정책이 결정되는 말도 안 되는 조선의 현실이 이영남의 또 다른 스승이었다. 이런 풍토를 따르는 것은 의로운 삶이 아니었다. 만백성을 모질게 학대해서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구하는 풍토를 모질게 잘라내는 것,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첫 번째 실천임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전북포스트 jbpost2014@hanmail.net

<저작권자 © 전북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출처: http://m.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73






[2022-04-25 15:05:57 에 등록된 글입니다.]



Copyright 1999-2023 Zeroboard / skin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