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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 3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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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 3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승인 2022.04.29  10:45:05



2.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



<3>

모악산인은 이영남에게 조선의 실체를 똑똑하게 설명했다. 불인(不仁)이 판을 치는 시절에 칼과 창만으로는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뜻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힘없고 가난하고 무식하다고 핍박받는 백성, 그러함에도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는 백성, 양반층에 함부로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그들이 바로 조선이라고 가르쳤다.

백성이 없는 나라가 무슨 나라냐, 백성이 나라의 근본인데도 백성을 업신여기는 그따위 것이,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을 외면하는 그따위 것이 무슨 나라냐. 사실이 이러한데도 되레 백성을 짐승처럼 부려 먹는 양반층의 작태는 하늘 즉 만백성에 죄를 짓는 저주받을 짓이란 점도 가르쳤다. 백성들 뜻이 모이면 쇠도 녹일 수 있다고 했으니 이 말은 만백성의 집단적 그리움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만백성이라는 뜻이었다. 이 같은 민본적 철학은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오천 년 한민족의 역사가 조선에 내린 최고의 선물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이영남은 무예를 익히는 틈틈이 모악산인의 말씀에 녹아들어 갔다. 눈앞에 보이는 유적(遺跡)들을 깊이 있게 따져서 사실과 진실을 벗어난 왜곡됨이 사람의 정신문화를 얼마나 옹색하게 만드는지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모악산 너머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의 미륵불을 이영남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금산사가 백제인들이 절실하게 믿는 익산의 미륵신앙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지어진 절일지라도 금산사는 미움받을 이유가 없는 절이었다. 어쩌면 전라도의 민중이 사랑한 절이 금산사일 것이었다. 전라도 민중의 희로애락을 사랑한 절이 금산사일 것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뜻과 아무 관계 없이 만들어진 미륵불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김유신과 김춘추 부대에 처참하게 짓밟힌 백제인, 떼죽음을 경험한 민중이었어도 그들은 다시 백제를 원했다. 통일신라의 수뇌부가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날마다 금산사에 모여드는 백제인들의 집단적인 소망에 경계심을 품은 것이었다. 통일신라 수뇌부는 얕은 꾀를 썼다. 백제인을 전혀 닮지 않은, 백제인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백제 민중의 형상과 아예 거리가 먼 이국적 취향의 찬란한 미륵불을 세워 놓고 여기에 소원을 빌면 능히 이뤄진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던 것이었다. 3층 높이의 거대한 토불(土佛)에 금물을 입힌 미륵불, 그것은 백제 민중의 원한을 희석시키기 위한 통일신라 수뇌부의 치졸한 통치력일 뿐이었다. 미륵불은 민중의 신앙이니 그 모습도 민중의 형상이어야 한다는 기본 상식조차 무시한 신라 지배층의 문화적 빈약함을 이영남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루의 수련을 마치고 고요히 자신과 마주하는 침묵의 시간이 진중해질수록 침착성과 집중력은 이영남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갈고 닦은 덕목이 어디에 쓰일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이영남은 무인이자 선비이고자 했다. 자신이 닦는 무예, 자신이 읽는 글줄이 덕에 닿는 것이라면 그 덕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쓰일지를 생각했다. 먹물같이 캄캄한 세상을 먹물로 밝히고자 하는 지식인일수록 당대 현실의 모순을 짚고 그것을 뛰어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 시대의 집단적 그리움이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고 있는 지식은 이타적(利他的) 삶을 현실화할 수 있는 필수적 요소였다. 백성의 재산을 병탄(倂呑)하고 인탄(蹸呑)하기 위해서 성리학이나 무예가 있을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모악산인은 무인과 선비를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입만 열면 정치와 경제를 끄집어내는 말짱 허드렛것들의 치기, 불평등한 현실에 맞서 동료와 결정적인 행동을 보여야 할 때 자신만 쏙 빠지는 노예근성을 경멸하라고 가르쳤다. 대승적(大乘的)이란 말을 입에 달고 정의를 내세우다가도, 돈만 보면 전혀 딴 얼굴로 제 잇속에 침이 튀는 일부 성리학자들의 근천기를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을 때 진정한 무인, 진정한 선비가 될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없다고 했던가. 날이 갈수록 그의 언행은 무겁고 담대해졌다.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챙겼고 너나들이로 살아갈 줄 아는 조선의 인심을 사랑했다. 그의 눈동자는 온화하고 따뜻했다. 바위도 녹일 법한 뜨거운 속내며 자신이 고수임을 눈빛으로도 감출 줄 아는 진짜 고수가 되어가는 중인지도 몰랐다.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방 보폭을 감지할 수 있었고 칼을 씀에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실력자가 되었던 것이었다. 활과 화살도 그의 신체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의 태도는 곧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전주성 밖 시오리, 구이면(龜耳面)에서 태산을 무너뜨리듯 그의 기합 소리가 모악산을 쩌렁쩌렁 울리면 사람들 마음은 저절로 흐뭇해졌다.

1588년 이영남은 한양에 있었다. 스승인 모악산인 김철은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면서 영남에게 하산을 명했다. 이영남은 스승의 곁을 떠나 무과시험을 치르는 한양으로 향했다. 초시에 응시하지 않았으므로 무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볼 겸해서 한양에 올라왔다.

이해 3월 16일에 무자식년시가 있었다. 한양에 살던 전의 이씨 이인신(李仁臣)이 을과 3위로, 이충길(李忠吉)이 을과 5위로 급제하였다. 이영남은 자기보다 10살 많은 이충길과 13살 많은 이인신과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이들이 자기보다 나이는 많지만 실력이 월등하게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알성시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알성시는 국왕이 문묘에 참배한 뒤 치르는 시험이었다. 초시가 없어도 1차 시험만으로 급제자를 선발했다. 영남이 전주에 있었더라면 이 소식을 듣고도 알성시에 참가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이영남은 급제한 이충길과 이언신에게 여러 가지 자문을 구하였다.

전의인(全義人) 이영남(李英男)은 선조 21년(1588) 불과 18세의 나이로 알성시 무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아무리 무과에 급제했다고 할지라도 이제 18살에 불과한 이영남이 나이 많은 부하들을 관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라에서는 이영남에게 군경력을 쌓게 할 목적으로 실직이 아닌 산함직을 주어 경상우수영으로 가도록 하였다. 그곳에서 군무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영남은 이곳에서 몇 년 경험을 쌓았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다는 소식도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이병초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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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902







[2022-04-29 14:40:05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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