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洋의 홈



3. 적선에 배를 붙여라! 1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작성자 : 김경운 
파일1 : 20220503_220718.jpg (137.2 KB)




홈 > 오피니언 > 이병초의 역사소설

3. 적선(賊船)에 배를 붙여라! 1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승인 2022.04.30  10:44:51



3. 적선(賊船)에 배를 붙여라! 1/2



1598년 음력 11월 19일. 관음포에 막힌 파도는 가팔랐다. 뱃머리가 둥실 불규칙적으로 또 둥실 떠오르는 게 심상치 않았다. 판옥선들의 집중적인 함포사격을 못 견디고 왜선들은 퇴로를 관음포로 잡았다. 이영남(李英男) 장군은 적선들끼리 부딪혀 깨지는 전방을 주시했다. 자신의 함대는 이순신 장군의 명령을 받고 관음포가 보이는 섬 안쪽에 쥐 죽은 듯이 매복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한번 뱃머리가 소스라치듯 둥실 떠올랐다. 순간 이영남의 몸에 전율이 감겼다. 이건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번갯불처럼 몸에 감기는 직관이었다.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포위망을 뚫고 관음포를 빠져나오려던 적선 중 몇 척이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에워싸려고 다가서는 것이었다. 두 시간 전만 해도 500여 척의 왜구들은 노량해협을 빠져나오자마자 조명 연합군의 전선에 박살났다. 순천 왜교성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부대가 조선 수군의 등 뒤를 쳐서 협공할 수도 있었지만 고니시 부대는 잠잠했다. 판옥선에서 함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고 있었다. 대장군전과 조란탄을 쏘고 신기전과 비격진천뢰며 불화살이 빗발같이 날아갔다. 바람은 북서풍이었다. 왜선들은 함포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침몰되기 시작했다. 소낙비같이 퍼부어지는 불화살 공격은 죽음의 광채를 띠었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불화살에는 발화탄이 장착되어 있어서 거울에 반사된 햇살처럼 발화탄이 터질 때마다 왜구들의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메웠다.

일본군들은 날아오는 불화살은 피하거나 닛본도로 막아냈다. 배에는 미리 물을 뿌려 두었는지 바닥에 떨어진 불화살은 선체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바로 꺼졌다. 하지만 불화살과 함께 날아오는 편전은 어둠 속에 보이지 않는 암살자처럼 불화살을 피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일본군들에 꽂혔다. 아니 일본군이 애기살에 몸을 대주는 것과 같았다.

이영남은 첫 번째 전투에서 부상당한 이후 배에서 활 쏘는 법을 연구하였고, 수군들에게 배에서 균형을 잡고 애깃살을 날리는 훈련을 시켰다. 조준 사격이 아니라 배 안쪽으로 화살이 떨어지도록 훈련시켰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한번에 한방향으로 화살을 쏘면 밀집해 있는 적들에겐 치명상일 것이었다. 대오를 맞추어 일제히 쏘아내는 이 애깃살에 왜군들은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사천에 주둔해 있었던 시마즈 함선과 남해에 주둔해 있었던 소오 함선, 부산에서 참전한 다키하시 함대까지 무려 500여 척의 왜구 함선들이 뒤엉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왜선들은 정면 승부를 피했다. 자신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었고, 이 전투는 순천 왜교성에 갇힌 고니시 부대의 탈출을 돕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흘 전 시마즈와 소오 그리고 고니시는 창신도에서 약속했다. 부산의 다카하시까지 합세할 자신들의 함선 500여 척이 노량의 바다를 빠져나오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하고 고니시 부대가 조선 수군의 등 뒤를 치겠다는 협공 작전을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낌새가 없었다. 고니시 함선이 조선 수군의 등 뒤를 치면 전투는 훨씬 수월할 수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 입에서 신음 소리가 났다. 그는 일본군 최정예부대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군이었다. 사천성 전투(1598.9.19- 10.1.)에서 그는 8천 명의 병사로 조·명연합군 3만 명을 격퇴한 무장이었다. 일본 전국시대 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고 가고시마[鹿兒島] 사쓰마 번(藩)의 영주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1만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보통 장군이 아닌 것이었다. 약속대로 고니시가 조선 수군의 뒤에서 협공만 해준다면 전투 양상은 뒤바뀔 것이었다. 노량해협을 통과하려는 500척과 광양만에서 치고 나올 고니시의 300척, 아차 하면 조선 수군은 무려 800척에 포위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니시가 공격만 해주면 승산은 되레 자신들에게 있었다. 포위당한 판옥선들이 당황해할 때 도선을 해서 백병전으로 승부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는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고니시 함대가 나타나질 않기 때문이었다.

왜장들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따질 여유조차 없었다. 갑판에서 쾅쾅 터지는 화포들, 불이 붙어 활활 타는 왜선들끼리 부딪히고 깨지는 상황인 데다 조선의 사수들이 쏘아대는 불화살과 조란탄과 비격진천뢰는 왜구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어서 퇴로를 정하고 판옥선에서 일제히 뿜어내는 함포사격의 사거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왜선들은 남해섬을 돌아나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축시 정에 시작된 전투는 묘시가 되었어도 불바다였다. 사위는 아직도 깜깜한 어둠 속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왜구들은 초조했다. 함포사격을 피할 길 없는 왜선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찬란하게 활활 불타올랐다. 일부 판옥선들은 왜선들을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충파 전술이었다. 조선 판옥선의 견고함은 명량해전에서도 증명이 되었다. 그때 왜선들은 얼마나 형편없이 깨지고 말았던가. 왜선들은 관음포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관음포 쪽으로 벌써 내닫는 왜선도 보였다. 그러나 거기는 육지로 이어진 포구였다. 전투선들이 불타고 있었지만, 동짓달 어둠 속이어서 관음포 쪽으로 뻗어간 바닷물이 왜선의 항해사들에겐 망망대해의 바닷길로 보였을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자신의 작전이 제대로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조선 수군이 노량의 바다로 출정했을 때 500척의 시마즈 함대와 300척의 고니시 함대에 포위될 것임은 자명한 것이었다. 이 작전을 꿰뚫어 본 통제사는 일본의 시마즈 함대가 노량해협을 빠져나오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전략을 짰다. 통제사는 우선 자신과 동명이인인 이순신(李純信)의 함대와 조방장 김완의 함대를 고니시 함대가 주둔해 있는 순천 왜교성 앞바다인 광양만에 진을 치게 했다. 고니시 부대가 가진 300척 함선의 발을 묶기 위함이었다.

이 작전은 적중했다. 노량의 바다에서 전투를 독려하는, 왜선들을 관음포로 몰아가라는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에 서릿발이 묻어 있었다. 지체하지 말고 왜선을 깨부수라는 북소리가 둥둥둥 둥둥둥둥 그치지 않았다. 한 척의 왜선도 돌려보내지 말고 단 한 명의 왜구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말라는 북소리에 응답하듯 조선의 판옥선들은 왜선들을 관음포로 몰았다. 아무리 봐도 바다처럼 보이는 포구, 그러나 바닷길이 꽉 막힌 포구,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로 왜선들을 몰아서 지긋지긋한 7년 전쟁의 끝을 보고 싶었다.

왜장들은 앞이 캄캄했다. 자신들의 장군이 잡은 퇴로가 육지로 막혀 있다니. 왜선들은 방향을 못 잡고 또다시 뒤엉키고 깨졌다. 왜선들 대부분은 이미 관음포로 몰려들고 있었다. 뒤에서는 판옥선이 돌파해오고 앞은 포구로 꽉 막혀 있는데 어느새 나타난 이영남 장군의 판옥선들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장들은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관음포에 갇힌 자신들을 구하러 올 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죽기 살기로 조선 수군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퇴로를 열어갔다. 조선 수군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 그보다 더한 탈출법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달랐다. 조선 수군은 무섭게 들이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끝을 보겠다는 듯이 자신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 /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전북포스트  jbpost2014@hanmail.net

<저작권자 © 전북포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909











[2022-05-03 22:07:59 에 등록된 글입니다.]



Copyright 1999-2023 Zeroboard / skin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