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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적선에 배를 붙여라! 2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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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적선(賊船)에 배를 붙여라! 2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승인 2022.05.03  16:29:47



3. 적선(賊船)에 배를 붙여라! 2/2



왜장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함선이 조선 함선보다 월등하게 많다고 믿을 터였다. 안택선과 세키부네 몇 척이 더 부서진다고 해도 일본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는 줄 수 없다는 것이 왜장들의 생각 같았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조선의 판옥선은 왜구의 전선과 질이 달랐다. 판옥선 한 척에 안택선 열 척을 견준다 해도 판옥선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함포사격이 주춤해진다 싶으면 판옥선은 여지없이 안택선과 세키부네들을 들이받아버렸다. 왜선들은 죽기 살기로 포위망을 뚫으며 조선 수군에 대응했다. 이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왜선들은 수도 없이 깨지고 침몰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왜구는 아예 바닷물로 뛰어들어 남해섬으로 도망쳤다.

이영남 장군은 이 상황을 냉철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왜선들이 대보름날의 달집처럼 불타올라주어서 공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대장군전을 방포했다.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이 불을 뿜어댔다. 왜선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의 포위망을 뚫으려던 왜선 중 몇 척이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고 갑판 위에서 포탄이 터지는 전투 상황, 살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 수군의 포위망을 뚫으려는 긴박함 속에서도 시마즈 함대 소속 안택선과 세키부네 몇 척이 대장선에 빠르게 덤벼들고 있었다. 또 한 번 배가 크게 흔들렸다. 대장선과 왜구의 전선이 맞부딪치려는 순간에 파도가 크게 역류했으리라.

이영남 장군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호위하는 판옥선들은 안 보였다. 포위망을 뚫으려는 왜선들에 집중적으로 함포사격을 퍼붓고 있기 때문이었다. 용왕님의 축복처럼 터지는 함포의 불꽃에 언뜻 왜장이 비쳤다. 와키자카였다. 피차 죽고 죽이는 전쟁터 속에서도 눈알을 빛내는 왜장 와키자카. 일본군의 선봉장임을 자처했던 와키자카. 이순신 장군에게 두 번이나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와키자카는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만큼은 꼭 잡아야겠다고 발악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적선(賊船)에 배를 붙여라!”

이영남 장군은 호령하면서 장검을 빼었다. 쿵, 이영남의 판옥선이 와키자카가 탄 안택선의 몸통을 들이받자 왜구 병사들이 비틀거렸다. 아군들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를 안 놓치고 이영남은 비호같이 적선에 뛰어올랐다. 뒤를 따르는 27명의 무사들도 칼날을 세우고 바람같이 왜구의 목을 베었다. 이게 뭐야, 겁 없이 덤비는 왜적의 목에 조선의 칼날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왜적들이 이 상황을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영남의 칼날에 다시 붉은 섬광이 일었다. 1차 해전이었던 옥포해전에서 부상당한 이후로 배 위에서 얼마나 집중적으로 훈련을 했던가. 얼마나 검을 휘둘렀던가. 출렁거리는 배 위에서도 육지에서와 똑같이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오늘 새벽에 전쟁을 끝내리라. 아군과 적군의 악령으로 들끓는 바다, 한 사람의 잘못된 욕망으로 모두가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원통한 바다, 사람의 피눈물이 마를 날 없었던 죽음의 바다에서 피 묻은 내 손으로 7년 전쟁을 끝내리라.’

이영남 장군의 칼날은 닥치는 대로 적을 찌르고 베었다. 그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몸에 이미 죽음의 갑옷이 입혀졌는지도 몰랐다. 이영남 장군의 칼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죽음을 베고 있는지도 몰랐다. 걸림새 없는 그의 칼바람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왜적의 목에서 시뻘건 피가 용솟음쳤다. 그의 장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왜적은 푹푹 거꾸러졌다. 왜적은 우수수 낙엽처럼 몰려왔다.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냉정하고 차갑게 가랑잎을 베어내듯이 왜적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새벽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시각, 새벽어둠이 거느린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무찌르듯이 이영남 장군의 칼이 왜적의 숨통을 베고 지나갈 때면 중년 남성의 쉰목소리 같은 파도 소리도 핏방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춤이라면 이보다 더 노여운 춤사위는 없으리라. 적선의 갑판에서 벌이는 이영남 장군의 칼춤 그것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왜구들에게 당한 멸시와 치욕을, 조선 수군이 떼죽임당한 현실과 거기에 맺힌 피 울음을 넘어서려는 칼춤은 노여웠다. 정유재란은 조선의 백성에게 씻을 수 없는 원통함을 남겼다. 임진년과 다르게 왜구들은 흡혈귀처럼 가는 곳마다 조선 백성을 떼죽음시켰다. 저들이 벌인 천인공노할 작태를 생각한다면 왜구들 목숨을 단번에 끊어버리는 것은 순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의 칼춤은 왜구의 피에 굶주린 진혼곡(鎭魂曲)이 되어야 했다. 왜구들에게 뼈와 살이 비틀리도록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한 뒤에 죽임을 건네는 것이 순리임을 이영남 장군이 모를 리 없었다.

적(敵)일지라도 최후의 순간만큼은 죽음의 고통을 가장 짧게 해주는 것이 조선 검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왜들이 저지른 만행을 용서할 수도 없었지만 아차 하는 순간 자신이 죽기 때문이었다. 진짜 죽일 놈들인 도도와 와키자카, 고니시 등의 왜군 수뇌부에 속한 이들이었다. 임진년에 전투를 벌일 때마다 악명 높은 이놈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숨통을 끊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수군(水軍)이었다. 육지로 도망간 왜장들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전투가 패하는 상황에 이르면 이놈들은 부하들을 버리고 쥐새끼같이 탈출했다. 이런 지휘관의 명령에 따랐을 왜구들이 불쌍했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본도를 휘두르며 갑판으로 튀어나온 왜구들은 사나웠다.

겁에 질려 다가오는 왜구는 없었다. 죽음을 감지한 눈빛들은 매서웠다. 개의치 않았다. 이영남 장군은 닥치는 대로 왜적을 베었다. 적(敵)을 죽이고 또 죽여서 떼죽음시키는 학살이 전쟁이었다. 그는 거친 숨을 고르듯이 옆과 뒤를 돌아봤다. 부하들이 궁금했다. 부하들도 이미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부하들이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한 용서는 없으리라. 아량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리듯이 이영남 장군의 칼은 짧게 베고 찌르며 갑판의 중앙으로 나갔다.

피에 굶주린 파도여, 용서하지 말라 관음포의 파도여, 왜적의 피를 마시고 싶은 바다의 육성을 입고 노엽게 쿨럭이는 관음포의 새벽어둠이여. 아직도 바닷속에서 헤매고 있을 수천수만의 혼령들을 위로해다오. 바닷속에 뛰어든 왜적들의 목숨과 조선 병사가 흘린 피를 거두어다오. 왜적의 목숨에 굶주린 내 뜨거운 피, 내 칼에 엉긴 피의 저주를 용서하지 말아다오. 아아, 칠천량 바다에 수장(水葬)된 1만 명의 동지들이여, 조선팔도에 사무친 원혼들이여, 인간이 저지른 떼죽임을 용서하지 말라. 전쟁과 전쟁의 피비린내로 덧칠된 인간의 역사, 하늘도 문을 닫아버린 인간의 오늘을 이 바다에 수장시켜다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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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925









[2022-05-03 22:09:3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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