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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벽어둠이 걷히다 1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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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벽어둠이 걷히다 1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승인 2022.05.05  13:53:21



4. 새벽어둠이 걷히다



<1>

적선의 갑판에 왜적들이 이영남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영남 장군은 이를 악물었다. 영남이 선택한 돌격방법은 첨추형(尖錐形)이었다. 뾰족한 송곳처럼 중앙에 이영남이 서고 좌우로 한 명씩 무사를 배치한 돌격형 전법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서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이 적선에 포위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자신의 직속상관인 이순신 장군의 안위를 튼실하게 지켜내는 것도 그에겐 중요한 임무였다. 통제사가 없었다면 조선팔도는 진작 왜적의 손에 넘어갔을 터였고 오늘 이 전장에 자신이 서 있을 이유도 없을 터였다.

환도(環刀) 한 자루만 들고 적선에 뛰어든 것 자체가 무리였을까. 찌르고 베고 낙엽처럼 우수수 훑어버려도 적은 계속 몰려왔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칼을 뽑은 순간 패퇴란 있을 수 없었다. 오늘 원혼(冤魂)이 되더라도 몸과 정신이 살아 있는 지금 후퇴란 없었다. 전쟁은 피차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저주라고 이영남 장군은 느낄 때가 많았다. 전쟁은 정말이지 죄악이었다. 아버지 이정효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 옳은 전쟁은 결단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임진년 들이닥친 전쟁이 필시 조선에 내려진 우박 같은 저주라 할지라도 지금은 왜적을 막아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전쟁이 하늘의 뜻일 수 없었다. 거기에는 조선 만백성의 뜻이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함에도 이 전쟁이 필시 하늘의 뜻이라면 왜적들을 처참하게 응징함으로써 하늘의 정신을 올바르게 되돌려 놓는 수밖에 없었다. 이영남 장군의 칼날은 거침없이 왜구의 숨통을 베고 찌르면서 전진했다. 왜구가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살도 안 된 어린애의 배를 갈라서 그 속에 쌀을 채우고 왜구 자신들의 승리를 축원하는 제물로 바쳤다던가.

또 이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부터 장군과 함께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장수들마저도 노량에서 이 전쟁의 끝을 보겠다는 통제사의 생각에 회의적이었다. 이순신 장군을 고깝게 여기기까지 했다. 전쟁에 패퇴했으니 그만 돌아가겠다는, 퇴로만 열어달라는 왜적을 굳이 소탕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팔도가 왜적의 칼날과 조총 앞에서 유린당한 일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냥 보내줄 수 없다는 게 통제사의 생각이었고 이영남 자신도 이 생각과 같았다.

제대로 된 조정이라면, 임진년으로부터 7년- 왜구에게 당한 치욕을 씻어내기 위해 조선 수군의 모든 함선을 이끌고 일본의 본토를 공격하는 게 옳았다. 일본 수뇌부들이 살고 있다는 성을 공략하여 남의 강토를 짓밟은 죗값, 무고한 백성들을 떼죽음시킨 죗값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그들의 혀로 핥도록 비참하게 돌려주는 게 마땅한 처사였다. 조선의 국력이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면 패퇴하여 도망가는 적을 궤멸시키는 것이 천만번 옳았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순리에 가까운 응징이었다. 남이 가진 물건을 보고 탐내는 마음이 전쟁의 시작이라면 그 마음의 불순한 씨앗을 뽑아버려야 하는 것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첩경이라고 이영남 장군은 생각했다.

적장 와키자카의 안택선 갑판에서 이영남 장군은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벌면서 왜적의 칼에 죽어가더라도 이순신 장군의 안위에 걱정이 없어진다면 상관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지금 입고 있는 갑옷이 자신의 수의(壽衣)가 된다는 것 그 자체를 더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금 벌이는 사투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만을 위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조선의 백성이 짐승처럼 유린당한 사실을 되돌려주는 준엄한 치죄였다. 조선의 자존감이 어떤 것인가를 왜적들 흉금에 칼자국처럼 남기는 것은 두고두고 그들에게 교훈이 될 터였다. 더구나 전쟁통에도 조선팔도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아들딸들에게 전쟁 공포가 덧씌워진 절망을 남겨줄 수는 없었다.

이영남은 뒤를 돌아봤다. 와키자카의 함선에 뛰어들 때 자신의 뒤를 따랐던 27명의 부하들 사정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놀라웠다. 이미 피칠갑이 된 부하들은 칼날을 낮춰잡고서 닥치는 대로 적의 목을 찌르고 베었다. 혹독한 훈련을 맹렬하게 이겨낸 부하들이었다.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을 때 거기서 살 길이 보인다는 법을 뼈저리게 경험한 부하들이었다. 그러므로 저들이 저지른 만행의 역사를 깡그리 뭉개버리듯 몸이 가벼웠고 칼날이 왜적의 목줄 깊이 파고들었다.

적선 갑판에 왜적의 피가 튈 때마다 이영남 장군의 눈앞에선 칠천량의 처참한 죽임의 현장이 떠올랐다. 자신은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지 못했어도 누구보다도 이 전투를 세세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권관 중 몇 명이 칠천량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조선 수군, 무려 1만 명을 웃도는 조선 수군의 목숨이 왜적들의 칼에 난도질당했다. 거북선 세 척을 포함한 세계 최고의 전투선인 판옥선 122척이 침몰당했던, 아군의 식량과 화포며 화약과 무기를 바닷물 속에 처박고 도망쳐야 했던 칠천량해전. 부하 몇을 데리고 살아서 돌아온 영등포 만호 우치적은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지 못했었다. 우치적 만호에게 들었던 전투 상황은 필시 군인임을 포기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수군이 궤멸당하는 원통한 상황 속에서도 새 통제사 원균은 술에 취해 있었다던가.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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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934






[2022-05-06 02:49:0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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