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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벽어둠이 걷히다 <2-1>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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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벽어둠이 걷히다 <2-1>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승인 2022.05.10  11:40:44


4. 새벽어둠이 걷히다

< 2-1 >

1597년 2월 26일, 이순신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원균은 새 통제사가 되었다. 새로 부임한 원균은 술만 먹었다. 이순신 장군은 ‘운주당’이란 집을 짓고 여기서 전략회의를 했다. 전략과 전술에 관계된 내용이라면 어떤 병사가 찾아와서 의견을 말해도 물리치지 않았고 그것이 올바르다면 즉각 현실 전투에 응용했다. 그러므로 조선 수군은 전투에 나가 패한 적이 없었다. 아니 패할 수가 없었다. 운주당(運籌堂)은 “주판알을 놓듯이 이리저리 궁리하고 계획한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었으니 어떤 방책을 짜낸다는 뜻도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 말뜻처럼 이 집에서 전략을 짜면서 운주했던 것이었다.

원균 통제사는 어떠했던가, 운주당에 첩을 들이고 허구헌 날 술잔치를 벌이지 않았던가. 운주당이 어떤 곳인지를 잘 알고 있을 터임에도 여기를 이중 울타리로 막아버려서 수하들조차도 그의 얼굴을 만나기가 힘들지 않았던가. 이런 새 통제사 원균을 상관으로 떠받들 휘하 장수들은 없었다. 병사들조차 그를 비웃었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원균이 통제사 직분을 받은 20여 일 후에 즉 1597년 3월 9일에 기문포 해전이 있었다. 거제도에 소속된 기문포에서 벌목하고 있던 왜구 47명의 목을 베었다고 원균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군왕 선조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이순신 장군을 내치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혔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승전보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기쁨은 잠시였다. 곧바로 올라온 김웅서의 장계와 권율의 장계는 기막힌 것이었다. 47명의 왜구 목을 벤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투에서 고성 현령 조응도와 그 함선에 타고 있던 조선 수군 140명이 전멸당했으며 판옥선 한 척을 빼앗겼다는 장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단 한 척도 빼앗기지 않은 판옥선도 빼앗긴 데다 고작 47명의 왜적을 잡기 위해서 현장 지휘관인 현령과 140명의 병사 목숨을 잃었던 전투. 기문포 해전은 명백한 패전이었다.

조정에서는 부산에 있는 일본 본진을 교란하라는 작전을 연속적으로 하달했다. 새 통제사 원균은 이 명령을 저버릴 수 없었다. 6월 18일 출정해서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안골포에서 해전을 치렀는데 원균은 보성군수 안흥국을 잃고 후퇴했다. 그러함에도 조정에서는 왜구의 본영인 부산을 치라는 질책성 명령이 연속적으로 날아들었다. 7월 7일 조선 수군은 한산도 본영에서 부산으로 출정했다가 7월 9일 제대로 전투를 치르지 못한 채 판옥선을 무려 20여 척을 잃어버렸다. 통제사 원균은 뒤도 안 돌아보고 한산도 본영으로 후퇴해버리고 말았다. 기문포와 안골포, 부산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위용을 보이기는커녕 일본 수군에 창피나 떨고 말았던 것이다.

1597년 1월 13일에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정유재란은 일어났다. 1597년 1월 22일,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였던 그때 원균은 조정에 어떤 장계를 올렸던가. 이순신이 부산을 공격하고 있지 않지만, 원균 자신이라면 능히 선제공격해서 왜 수군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것 아니었던가. 다시 말하면 자신이라면 부산을 선제공격할 수 있고 자신이라면 왜장 가토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장계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통제사가 된 후의 원균은 3월 29일의 장계에서 자신의 의견을 뒤집었다. 부산의 일본군 본영을 공격하는 일은 수군만으로는 역부족이니 육군을 이 전투에 합류케 해달라는 것이었다.

원균이 육해군 연합작전을 요청한 점은 출전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바다에서 싸우던 왜군들이 모두 육지로 들어가버리면 오히려 싸움을 안 함만도 못하니 육군과 연합작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제공격할 수 있다는 제 뜻을 불과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 바꿔버린 것은 원균이 전략적인 데 미숙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전쟁의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십분 고려해봐도 그랬다. 한 번에 끝낼 일을 두 번 세 번에 걸쳐서 해내는 행위는 전략과 전술에 취약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도원수 권율 장군의 휘하 육군 병력 5천 명을 원균의 수군에 배속시켜 주었다.

통제영에는 왜군의 본영을 치라는 파발이 계속 날아들었다. 통제사 원균은 여전히 수륙병진 작전을 고집하면서 출정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도원수 권율은 그를 곤양으로 불러들였다. 누가 도원수일지라도 직무유기를 일삼는 원균의 작태를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이었다. 선조의 뜻을 읽고 있는 권율의 의도는 명백했다. 부산에 있는 왜군 전진기지를 선제공격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을 주장을 환하게 알고 있는 셈이었다. 무력한 조정이었고 치졸한 벼슬아치도 대다수였지만 전투의 앞뒤를 가리지 못할 만큼 바보 집단이 조정은 아니었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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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946








[2022-05-10 13:29:11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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