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하구사람 2023. 2. 2. 12:17
질 게 뻔해도
정양
나는 가끔 티비 프로그램 중
장기 두는 걸 즐겨 본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고수일수록 질 듯한 판은
서둘러 포기해버리고 하수일수록
질 게 뻔해도 끝까지 둔다
무슨 의로운 일에 목숨 걸어야지 싶어
늙어 병들어 죽는 걸 부끄럽게 여기던
고수인 척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거니
이제 와 돌이켜보면
질 게 뻔해도 끝까지 두는 게
세상에 대한 최선의 예의인 것 같다
최선의 예의일지 마지못한 도리일지
늙어서 병들어 죽는 걸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질 게 뻔해도 끝까지 두는
끝까지 시달리는 하수들의 회한이
장기판마다 새삼 되씹힌다
- 시집 『암시랑토앙케』, 몰개, 2023
싸움에서 고수와 하수를 가르는 것은 상대적이다. 보통 승부가 일방적으로 기울면 고수와 하수의 자리를 명확히 나누어 앉는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이기고 지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굳어진 행동이 묻어 나온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 동네 공원에서 읽은 승부사들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시 동네에서도 고수와 하수가 종종 어울린다. 마주 앉아 결판을 내는 승부의 영역이 아니므로, 이들은 복잡한 관계를 형성한다. 예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얼굴이지만, 마음속에 설정한 고수와 하수의 품위를 들키고 만다. 존경이나 흠모나 질투와 무시 등으로 엮이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고수나 하수나 “질 게 뻔해도 끝까지 두는” 버릇으로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것이다. 시는 스스로 견디는 싸움이므로, 상대 품으로 들어가 후빌 이유도 없고 문장을 붙잡고 한쪽에 숨어 흠잡을 필요도 없다. 편안하게 늙는 마음으로 만난 말씀 한마디 귀하게 받아 적으며 가야 하는 길이 있다.
출처 티스토리 금강하구사람
http://rmarkdgkrntkfka.tistory.com/1705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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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3 10:19:39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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