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초의 시비평 ‘몽당연필’] “오손적도손적 오르래도르래” 살았다 정동철 시집 '모롱지 설화' 서평
이병초 시인 승인 2023.03.22 16:20 댓글 0기사공유하기
정동철 시인의 새 시집 '모롱지 설화'(2023. 걷는사람)는 언어적 색감의 원형질이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시편마다 한 개의 화소(話素)가 마침맞게 들어앉은 서사는 황방산 아랫자락에 집들이 길게 이어졌던 서곡(瑞谷) 마을의 역사다. 여기를 ‘모롱지’라고도 불렀다는데 왜 서곡을 모롱지라고 불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시인의 고향 풍정을 호출한 '모롱지 설화'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의 농경문화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개발이라는 말이 닿지 않는 가난한 땅, 그러나 모롱지 사람들의 말씨에 간직된 삶의 모습은 유쾌하고 정답다. 전북의 토박이말이 순 날것으로 빛날지언정 살가운 말씨 이면에 감춰진 개인사는 쉽게 드러나지 않고 “오손적도손적 오르래도르래 살았다”(「복순이네 집」)라는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시의 화두로 삼는다.
돈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모더락불은 토시락토시락”(「모더락불」) 타들어 가고, 액(厄)을 끌고 온 구렁이에 “오지 말그라 다시 오면 작두칼로 세닐곱 스물한짝 토막”(「잔밥각시」)낼 요량이라는 무가적(巫歌的) 색채를 지나, 은인을 찾아온 날이 하필 은인이 죽은 날임을 알고 “아이고오 이년이 물짠년이여”(「연옥분」)라고 자신을 꾸짖는 등의 말씨는 사람다움의 품이 모롱지 바깥으로 확장되는 시의 울림을 얻는다.
시의 현재에 동참하는 숭불통이, 또망, 닭기퉁가리, 포도시, 올기쌀, 자지근허게, 뽀로로, 갠소롬허니, 오속뽀속, 돌치, 소두방, 꽃찰메, 시마자구, 꾀꽝시럽네, 옹구락지당게로, 놉, 넋베 등의 시어는 농경문화가 가꾼 언어적 색감의 원형질을 드러낸다. 시인의 공력이 돋보이는 이 원형질의 언어 질감을 씨앗처럼 빛나게 해주는 것은 해학과 풍자이다. 똥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전쟁놀이 대빵을 꿈꾸는 어린 화자, 별호가 팥니가 아니라 이름을 팔아서 ‘판니’인 김강님 아지매, 서울말 쓴다고 뽕란이 누님이 말끝마다 ‘-니’자를 붙이는 것에 입맛 버렸다는 듯 “니미 뽕이니?”라고 되받아치는 등의 화소는 모롱지 사람들의 낙관적 삶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중의성을 띠는 「개새끼들」은 또 어떤가. 개가 짖는 소리에 잠을 못 잤다는 전(前) 대통령의 꿀잠을 위해 호반촌에 있는 개들을 몽땅 끌어다가 하가리 파출소에 가둬버린 데서 벌어진 해프닝은 일국의 대통령을 개새끼들 밑으로 끌어내리지 않았던가.
동물과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시의 언사, ‘나’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정동철 시인의 언어미학은 현대성이 몹시 앓는 자폐적 징후나 이기주의를 후련하게 뛰어넘는다. 모롱지는 이제 귀퉁이만 남았다. 전답이며 동네였던 자리에 아파트와 콘크리트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우리는 “오손적도손적 오르래도르래 살았다”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동철 시인의 새 시집 '모롱지 설화'는 묻는다. 오늘 우리가 잃은 게 무엇인가를.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인가를.
이병초 시인은 : 시인, 전주 출생. 1998년 《시안》에 「황방산의 달」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이 있고 시비평집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가 있다.
출처; 전북도민일보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8484&sc_section_code=S1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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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2 18:01:56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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