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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더 생생한 <돌려말하기> - 한국일보 1994.8.4. 張敬烈
작성자 : 관리자 


재치있는 표현 몇 마디, 충격적인 말 몇 마디로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들이 이런 종류의 말장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삶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시, 삶의 현장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을 선연하게 떠올리게 하는 시다운 시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기껏해야 광고문안의 글귀 수준을 맴돌 뿐인 시들 사이를 헤매다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鄭洋씨의 <해장국밥 앞에서>(실천문학 여름호)와 같은 시와 만난다.

  <해장국밥 앞에서>라는 시에서 우리는 우선 지난 2월 작고한 김남주시인을 떠나보내기 위한 밤샘 끝의 시인과 만난다. <술도 잠도 덜 깬 늦은 아침 / 서둘러 해장국밥 먹으러 간다>  상가에서 밤을 보내고 밖으로 나온 시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서둘러 녹>는 <길모퉁이 녹다 만 눈들>과 <오가는 발길 사이로> <어지럽게 부서>지는 <햇살>이다. <술도 잠도 덜 깬> 시인이 느끼는 눈의 피로가, 하얀 빛의  눈과 이를 <서둘러 녹>이는 <어지>러운 햇살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러나 눈의 피로는 단지 술을 들었다거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안경알 빠져버>려 <세상이 다 흐려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이 다 흐려보>였던 것은 안경알이 단순히 빠져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고한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건, 삶에 대한 아픔 때문이건 시인에게는 <세상이 다 흐려보>일 수밖에 없었던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를 시인은 <술이 덜 깬 탓>에 <안경알 빠져버린 걸 미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돌려 말하기>가 아니었다면 시인의 안타까움과 아픔이 어찌 이 시에서처럼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겠는가.


이윽고 시인은 <해장국밥 기다리는 동안 / 안경알을 닦으려다가 / 알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알 빠진 / 안경테처럼> <멋쩍>음을 느낀다. 사는 것이란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잃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 그냥쟝 잃어버>린 채 본눙적인 허기나 달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해장국밥>을 앞에 놓고 허기를 달래려다가 < 잃어버리고 사는 것들이 / 토막난 필름들이 토막난 그리움이> 문득 <한꺼번에 다투어 지나>감에 <난데없는 눈물이 / 토악질처럼 쏟아지>는 것이 곧 우리의 삶이 아닐까.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 삶의 아픔을 이 시만큼 선연하게 살리기란 쉽지 않다. 이 시에서 우리가 시다운 시를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시인의 마음떨림을, 그러한 떨림에 공명하는 우리 마음을 느낄 수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앞에서> 우리 눈은 또한 <흐려>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06-11-22 22:30:4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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