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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언어의 심연 - 1997년 <작가> 여름호 <지난계절의 시평> 중에서, 김형수
작성자 : 관리자 


  이제 좀더 본격적인 시 이야기로 들어거보자. 우리는 시가 당대의 지성이 몸살을 앓으면서 조합해내는 어떤 전망의 가시권 안으로 진입해들어가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래서 시는 모름지기 자기시대의 곤혹과 딜레마를 통찰할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오늘의 곤혹과 딜레마인지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 '80년대에도 가장 많이 나왔던 지적들이, 시적 전망이 사회과학적 전망의 식민지가 되는 것에 대한 우려였던 바 어쩌면 이것은 이론작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인지 모른다. 이것을 그 실마리라 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나는 가끔 이미지의 힘을 빌려 그 '곤혹과 딜레마'의 실체에 접근하는 경우를 본다. 다음 정 양의 시에도 그런 것이 들어 있다.

   죽어버린 줄도
   모르나보다 저렇게
   칼질을 당하고도
   아직도 산 줄로 아나보다
   죽은 줄을 모르니까
   토막난 게 아픈가보다s

   토막난 노래 토막난 역사
   토막난 사랑 토막난 분노들이
   산 것처럼 꿈틀거려서
   남도의 선술집 구석구석
   소주맛을 돋구고 있다.


               (정 양, <낙지회> 중에서)

  이것은 <작가> 5.6월 호에 실린 시로서, 술집에서 낙지회를 시켜놓고 접시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생명체를 내려다보면서 하는 노래이다. 이 시를 단순한 술안주의 노래로 읽히지 않게 하는 구절이 "토막난 노래 토막난 역사/ 토막난 사랑 토막난 분노"인데 단순이미지로 차용된 것은 아닐까 싶게 그 순차성이 없이 무분별해 보이는 이 구절은 그러나 우리의 오늘을 내려다보는 데 다소 끔찍스러운 정밀성이 있다.
부분이 부분들의 연쇄에서 절단이 나면 그것은 전체로 보아 죽음이 된다. 마치 미세한 부속품들이 연결되어 있는 시계와 같이 나사못 하나가 기능을 멈추면 시계 전체가 죽는 것이다. 그런데 죽은 시계 안에서 여전히 헛바퀴를 돌면서 작동하고 있는 부품이 자기는 살아 있는 것으로 알고 다른 것들에게 분노한다. 우리 사회에서, 혹은 역사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광경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가만히 보면 어느 곳을 뜯어봐도 그런 것은 있다. 나는 문학에서도 그것을 느낀다.

  우리 근대시는 그 출발의 시점에서 극히 혼돈의 양상을 보여왔다. 그것은 장르로서의 정체성을 뒷받침해줄 만한 전통이 불투명했던 데 기인한다. 오늘의 시인들에게까지 규정적 힘을 발휘하는 우리말 근대시의 시작은 정지용, 임화, 김기림, 백석 등인 것 같은데 어쨌든 제약할 힘이자 의존할 모범으로서의 확소한 시적 양식이 불투명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겪었던 식민지적 현실에 대응되는 우리문학의 자기망각의 역사 그것이다.



[2006-11-22 22:31:2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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