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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의 이정표를 찾아서 - 1999 겨울, 장경렬
작성자 : 관리자 


요컨대, 삶을 떠나지도 않고 언어에 미혹되지도 않으려는 이중의 긴장 상태에서 시다운 시는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표현을 달리하면, 삶과 언어가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시는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시다운 시가 어려운 이유는 이와 같은 긴장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역량을 누구나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회의에 휩싸인 우리에게 1997년에 출간된 정양의『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창작과 비평사)는 하나의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 가운데 특히 「물 끓이기」와 같은 시가 우리의 시선을 끄는데, 그는 이 시에서 우리가 보통 무심하게 지나쳐버리는 일상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예기치 않은 삶의 깊이와 넓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양의 「물 끓이기」에서 중심이 되는 이미지는 '냄비 속의 맹물'로, 시인은 어느 날 국수를 삶기 위해 물을 끓이다가 이러저러한 상념에 빠져든다.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 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온갖 신경질 다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쓰럽다

-「물 끓이기」부분
  '맹물'을 '끓'이다가 시인은 문득 자신이 '끓어오를 일 너무 많'으나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즉, 시인은 '끓'는 '물'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문제는 '끓어오를 일'의 빌미가 되는 것들은 '작고 천한 모기'와 같은 것들.'말단'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무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작고 하찮은 것들이 사람들을 '끓어오르'게 하고 '열받'게 한다. 결국에는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이고 '열받는 사람만 쑥스'러워질 것임을 빤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끓어오르'기도 하고 '열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사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너무 크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은 너무 크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추상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인 것으로 인해 흥분을 하기도 하고 화도 내기는 하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원인 제공자는 뒤편에서 작디작은 세상사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힘일 수 있고, 따라서 사람들이 '열받'고 '끓어오르'지 않기 위해서는 '세계'의 개혁은 근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직도/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이고 '열받는 사람만 쑥스'러워지는 '세상'에서,'다산 선생'과 '김수영 시인'이 살던 때와 비교해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세상'에서 시인은 여전히 '끓어오르'고 '열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시인은 '끓어오르'고 '열받'을 일이 없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꿈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물 끓이기」부분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고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란 감정 표출의 자유가 존중되는 세상일 것이다. 시인이 꿈꾸는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란 바로 '그런 세상'인 것이다. 즉, 이 시의 끝 부분에서 시인이 암시하고 있는 듯, 그는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맘놓고 넘'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염원을 反語的으로 읽을 수도 있다. '끓어올라 넘치'는 식의 감정 표출의 자유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라는 시인의 물음은 수사적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러한 세상이란 얼마나 아름답지 못한 것이냐라는 말로 풀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인이 무의식적으로나마 '끓어올라 넘'칠 일이 아예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시인의 꿈은 이처럼 아주 거창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시인은 끝까지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와 관련하여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시의 앞부분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듯이 '맹물은/끓어도 넘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뒤집어 읽으면, 세상에는 아무리 끓어도 넘칠 수 없는 '맹물'과 같은 것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한 '맹물'과 같은 것이 무엇인가. 이는 곧 시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말하자면,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 '맹물'에서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삶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맹물'과도 같은 자신의 현재 삶을 뛰어넘어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맘놓고 넘'칠 수 있기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06-11-22 22:31:4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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