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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텍스트, 화자, 그리고 재미 - 윤재웅
작성자 : 관리자 


충돌하는 목소리

  동일한 텍스트에서 시점의 교란이 미덕일 수 있는가? 상충적인 혹은 완전히 이질적인 목소리가 한 텍스트 안에 등장하는 것은 파킨이 설파한 화자 고유의 기능을 무력화 하는 것인가? 텍스트의 내부와 외부를 오가는 화자의 유동성이 텍스트 이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목소리의 위치가 다르다면 '심미 대상'도 달라지는가?

  이 같은 질문은 화자와 관련된 텍스트 분석에 있어서 중요한 제목들의 지극히 적은 일부분들이다. 논점들은 상상 외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무수한 의문이나 이론들이 텍스트 자체에 앞서 선행하는 경우는 없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일차 텍스트이다. 이론과 원리와 비평은 텍스트로부터 출발한다. 화자에 대한 모든 논의도 그것이 텍스트를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는 한 현학일 뿐이다.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텍스트를 보다 완전하고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화자 시학은 언제나 이 점을 중시해야 한다.

  앞으로 전개되는 논의는 이를 위한 조그만 시도이다. 먼저 하나의 시 텍스트 속에서 충돌하는 두 화자의 병치가 텍스트 미학을 어떻게 구축하는가 하는 실례를 보이겠다. 그 다음의 분석적 시도는 화자가 텍스트의 안팎을 오가는 가능성과 그것이 미치는 의미론적 이해의 변화 양상을 추적해감으로써 텍스트 분석에서의 화자 논의의 긴요함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 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손등의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정  양 <토막말>

  정 양(1942--)의 네 번째 시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창작과비평사)에 실려 있는 이 시는 화자 논의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준다. 텍스트 속의 발화 행위자는 명백하게 둘이다. 그러나 두 행위자는 같은 시간대에 있지 않다. 같은 장소에서 둘이 만나는 방식은 전에 있었던 행위자의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이다. 그 기록이 바로 이 시의 제목인 토막말이다.

  삽압 텍스트로서의 토막말은 텍스트의 발화를 이끌어가는 주화자(主話者)로서는 전후 문맥을 알 수 없는 보조화자의 담화이다. 그것은 '낯선' 방식으로 주화자에게 다가온다. 간명하게 이야기한다면 이 텍스트는 화자가 다른 화자의 발화를 '인용'하는 경우이다. 화자 속에는 또 다른 화자가 있다. 그런데 그 또 다른 화자는 화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으며 화자에 의해 '체험된 것을 선택하여 드러내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둘은 성격상 서로 충돌한다. 주화자가 이성적이고 섬세하며 절제의 미덕을 몸에 익힌 교양인이라면, 보조화자는 정감적이고 우직하며 사랑의 결핍과 열정을 거리낌없이 표방하는 개성의 소유자다. 또한 주화자는 세계를 심미적으로 이해하려는 담화의 수행자이지만 보조화자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비속적인 담화의 수행자이다. 둘의 성격이 충돌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두 담화의 수행자는 비록 '주,보조'의 역할을 나누어 맡고 있지만, 텍스트의 무게중심은 어느 한 쪽에 쏠리지 않는다. 주화자의 심미적 담화는 보조화자의 '무지막지하게 아름다운' 담화에 충격을 받고 있음을 토로한다. 충격의 본질은 '낯섦'이다. 그것은 심미적 교양인의 의식 속으로 쳐들어와서 순식간에 그것을 지배해버린다. 그러므로 밑도 끝도 없이 무지막지한 토막말은 단순한 인용담화 이상의 기능을 한다. 텍스트의 심미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다.

  가을바다의 쓸쓸한 배경에 대한 주화자의 정서적 감회는 이로써 더욱 처연해진다. 해변에 커다랗게 쓰여진 무지막지한 '막말'이 주화자의 의식 속에서 구성되는 세련된 담화를 역설적으로 지배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인용된 '막말'이 다른 글씨체로 인쇄되었다는 '실제적으로 보여지는 형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막말'은 오히려 복잡한 방식으로 심미성을 추구하는 시의 세계에 일대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아주 낯설게 '의식을 때리는 형식'으로 자리집는다. 그 한 사례가 메시지로서의 '막말'이 지향하고 있는 청자(혹은 독자)이다. '막말'의 청자(독자)가 '하늘'일지도 모른다는 주화자의 생각은 비단 그 글자들이 대문짝만하게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담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 곧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독자의 한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씌여진 글'로서의 "막말'은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규범의 한 전제가 되는 청자(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들려주는 말이며 하늘에게만 보이고 싶은 글이다.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오면 금세 몸이 저릴(휩쓸려 사라질), 그러나 너무도 간절하게 사무치는 동경의 형식이다. 이런 명백하게 비문학적인 텍스트가 누천의 전통을 자랑하는 문학텍스트를 압도하는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 형식임을 작관하는 순간, 세계는 갑자기 낯설어져버리는 것이다. 화자의 의식은 다음과 같이 전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시보다 아름답구나!' 이런 추정이 텍스트를 한층 재미있게 만든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성격상 상호 대립되는 화자가 텍스트의 보다 높은 미적 효과를 위해 협력하는 방식은 서정시의 경우에서 흔치 않다. 이것은 텍스트 구성에 있어서의 화자의 기능에 대한 각별한 통찰이 있어야 가능하다. 만약에 위의 인용 텍스트가 "가을 바닷가에/누가 써놓고 간 말"을 활용하지 않았다면 구조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이야말로 텍스트를 구성하는 주요 제재로서 보조담화가 아닌 중심 담화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서정시의 화자가 반드시 단일하고 통일된 성격을 지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시인이나 독자들은 다같이 화자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고려해야만 한다. 위에서 논의한 주화자와 보조화자의 개념은 순전히 기능적인 측면만이 고려된 것이다. 이것은 분석을 위한 단순한 도구이지 모든 발화 텍스트에 엄존하는 실체가 아니다. 개개의 텍스트를 보다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화자를 논의한다면 거기에 맞는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서사연구저널 <내러티브> 창간호 2000년 봄)


[2006-11-22 22:32:21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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