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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남루를 껴안는 쓸쓸함의 깊이 - 정양 시선집 <눈 내리는 마을>, 강연호
작성자 : 관리자 


  이제쯤 정 양 시인에 대한 사적인 인상을 밝히면서 글을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시인 정 양이 아니라 사람 정 양을 직접 뵌 것이 '97년이니까 벌써 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이고 그 시간은 그리 짧지 않아서 이런저런 행사와 뒤풀이 자리에서 시인과 마주하여 술잔을 나누기도 했으므로, 조금은 무례할 수밖에 없는 이 글머리를 그가 한바탕 너털웃음으로 넘길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궁리가 들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대뜸 정색을 하고 그의 작품들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시도한다면 그는 더 크게 웃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다. 무례한 김에 좀더 솔직하자면 20년의 연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남다르게 친한 척하고 싶은, 정말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작용했을 것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키가 훤칠했으나 다소 구부정했고, 덩치가 좋았으나 이미 질풍노도의 젊음은 아니었다. 아예 버릇없이 말하자면 그의 풍모에서 시인이자 교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항용 말하는 위엄이나 어른을 느끼기도 어려웠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이런저런 가늠을 속으로 하게 마련이므로, 나는 익히 들은 바대로 그의 주변에 동료와 후배들, 심지어 새파란 문청들까지 들끓는 이유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그의 성품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만나서도 그 자리를 편하게 이끄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낯서음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한 작위나 꾸밈이 아니라 진솔하게 자연스럽기는 또한 쉽다고 할 일이 아니다. 사람 정양에게는 그런 자연스러움 속에 큰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 그의 지인들이 그를 흔히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 그늘 무성한 나무 아래 어찌 사람이 모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확실해졌지만 내가 그에게서 위엄이나 어른을 느끼지 못한 것은, 그가 진짜 위엄을 갖춘 어른이면서도 그것을 풍모에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 빛은 빛나지 않는 법이므로 아마 그는 체질적으로 그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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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자리는 사람 정양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시인 정양을, 더 정확히는 정양의 작품들에 대해 말하는 자리이므로 이번에 나온 그의 시집 <눈 내리는 마을>(모아드림 2001)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 <눈 내리는 마을>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인 자신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1부의 작품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네 권의 옛시집에서 추려낸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시선집을 통해 시인 정양의 시세계와 그 출발에서 현재까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는 셈이다.

  여기서 나는 그의 시세계가 이러저러한 지속과 변모를 보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 시인의 작품세계가 일정한 지속성을 보여주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 있는 일일 테고, 뚜렷한 변모가 있었다면 그것 역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쓰기는 때로 지속을 위한 지속이나 변모를 위한 변모를 낳기도 한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시에 매달려 그것을 인위적으로 제작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는 말이다. 시인 정양은 그러한 시쓰기의 의도나 전략을 처음부터 아예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 자신이 머리말에서 "시에 관한 한 억지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라고 한 것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그의 작품들에서 구태여 지속을 찾는다면 세상의 남루를 껴안는 시선의 따뜻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변모를 찾는다면 젊은날의 긴장과 불화에서 벗어나 이제 그것들조차 내면에서 녹여내는 연륜의 깊이가 묻어난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사람 정양이 아니라 시인 정양을 말해야 한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는 사람 정양이 곧 시인 정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드문 시인이다. 세상에 글 쓰는 사람도 많고 시인도 적지 않지만, 글이 곧 그 사람 자체인 경우를 솔직히 나는 많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직접 만나지 않고 작품으로만 접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뻔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 정양의 작품에서 나는 사람 정양을 늘 발견한다.

  시와 삶의 일치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정양 시인은 진짜 어른이지만, 내가 그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하는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다. 엉뚱하게도 나는 사람 좋은 그의 모습에서 아주 드물게 문득 나타났다 사라지는 쓸쓸함의 흔적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 쓸쓸함의 흔적들이 모여서 사람 정양의 진짜 풍모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그 드문 순간을 그는 아니나다를까 금방 너털웃음으로 흘려버리곤 한다. 그러나 삶의 쓸쓸함은 그렇게 흘낏 지나칠 때 더 가슴을 치는 게 아니던가. 적어도 내게는 그 미세하게 지나쳐간 흔적들이 오히려 그를 더욱 어른이게 하고 그와 더불어 있고 싶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람 정양에게서 발견하는 예의 쓸쓸함을 시인 정양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시집 <눈 내리는 마을>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 중에서, 기왕에 발표하지 않은 것들을 모은 1부의 시들을 통해서도 그것은 금방 확인된다.

     아줌마, 얼마나 더 가면 지평선이 나와요

     여그가 바로 지평선이어라우
     여그는 천지사방이 다 지평선이어라우
     바람 들옹게 되창문이나 좀 닫으쇼 잉

     그렇구나 이 세상에는 천지사방
     지평선 아닌 데가 없겠구나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다 가물거리겠구나

                           <지평선> 부분



     그 흙이 오래 묻혀 있으면
     탄화작용이, 탄소알갱이가 어떻고
     석탄이 되고 석유가 되고 더러는 금강석도 된다는
     담임선생님의 과학적 설명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마치는 쓸쓸한 눈빛이 자꾸 맘에 걸려서
     그 흙을 캐어 태워먹는 일이
     두고두고 꺼림칙했다

     그 토탄이 선생님의 쓸쓸하던 눈빛이
     문득 맘에 걸린다
     석탄이 되든 금강석이 되든 말든 내 사랑도
     이 세상에 없는 듯
     묻혀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토탄> 부분

  시 <지평선>은 만경강 건너 지평선이 보인다는 곳을 찾아간 시인이 주막집 아줌마에게 지평선이 어디냐고 묻는 정황을 갖고 있다. 지평선이 어디냐고 묻는 일의 어리석음이여, 과연 아줌마는 천지사방이 다 지평선이라며 바람 들어오니 문이나 닫으라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질문의 어리석음은 시인의 어리석음이 아니다. 시인은 지금 "보고 싶은 것들"이 있는 사람이지만, 보고 싶은 감정을 "언제/어디서서나 다 가물거리겠다"는 새삼스러운 인식으로 달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을 역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나 다 가물거리지만 정작 지금 눈 앞에 직접 현현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이 세상의 모든 보고 싶은 것들의 속성이 아니겠는가. 인용한 두 번째 작품 <토탄>에서 "내 사랑도 이 세상에 없는 듯/ 묻혀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는 시인의 눈빛이 "선생님의 쓸쓸하던 눈빛"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세상살이의 이 쓸쓸한 단면을 어떻게 달리 포착할 수 있겠는가. 그 쓸쓸함은 섣부른 감수성에서 얻어진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신산스러움과 분노, 그리움 등을 한 데 녹여 껴안아 그것들이 내면에서 곰삭을 때 얻게 되는 쓸쓸함이다. 작품 속의 <선생님>이나 화자처럼, 글을 읽는 나도 함께 그 쓸쓸함을 얻고 싶다.

  지금 나는 정양 시인의 속내를 다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연륜의 깊이를 어찌 다 읽어낼 수 있겠는가. 그의 작품들에서 묻어나는 연륜의 깊이는 때로 "가릴 것도 제대로 못 가리고/ 낯도 안 붉히고 나는 늙는다" (<낯도 안 붉히고>)는 자책이나 "나이 들수록 속절없이 산천은 곱다"(<봄나들이>)는 회한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연륜이란 말의 엄격한 의미는 육체적 나이만으로는 얻어질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깨달음을 동반해야 비로소 연륜의 깊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은 세상의 남루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남루 안에서 그것을 함께 견뎌냄으로써 깊이를 얻고자 한다. 그는 사람들이 "피차 견딜 만한 말투"로 서로 하대를 하는 자리에서 "빈 속에 주는 대로 받아마신 소주가 / 나도 아직은 견딜 만"(<산토끼탕>)하다고 말한다. 그 때는 과연 내리는 눈발조차,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 해라쪼로 자꾸만" (<눈 오는 날>)내릴 것이다.

  이번의 시선집 <눈 내리는 마을>을 통해 새삼 확인하는 바이지만, 정양 시인의 작품들은 대부분 자신과 이웃의 사소하면서도 고만고만한 일상을 포착하고 있어 요란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어떤 큰 목소리나 날카로운 외침보다 더 넉넉한 울림을 전하고 있는 이유는, 세상의 남루 속에서 그것을 껴안아 견디는 시인의 시선이 언제나 깊고 그윽하기 때문일 것이다.

       3

두서없는 글을 결론 삼아 글 번호를 달리 달아보지만 애초에 분석적 시읽기의 방식을 택하지 않고 시인의 풍모에 대한 개인적 인상으로 글을 시작한 나로서는 이제 딱히 덧붙일 말이 없을 것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내 모든 얘기를 털어놓을 때가 있는 사람이므로,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다음 시를 함께 읽어보고자 한다.

       건성으로라도 무엇을 물어온다면
       무엇이든 열심히 말하리라.
       물어보는 그것이
       한 평생 감추고 사는 것일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탁 까놓고 말하리라
       한숨 섞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한숨 쉬는 대목은 부러뜨려 술을 권하고
       덩달아서 길게 한숨을 쉬리라
       이 세상 끝까지 상관하고 싶은 한숨을 쉬면서
       내 진실과 그늘
       아름다움과 슬픔과 절망과 고통들을
       죄다 털어놓고 말리라
       이 세상 끝까지 다 저물기 전에
       아줌마가 어서 한가해지기를 기다린다

                                     <선술집에서> 부분

  별다른 부기나 설명이 필요 없는 이 작품에서처럼 나도 정양 시인이 한가해지기를 기다린다. 그가 한가해졌을 때 그를 만나 내 이러저러한 속내  털어놓고 싶다. 아니 그는 한가하든 한가하지 않든 누구든지 와서 자신을 털어놓을 때 같이 웃고 고민하고 울어줄 것이다. 문제는 그의 한가함의 여부에 ㅇ 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내 진실과 그늘'을 죄다 털어놓을 자신이 있을지 없을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문예연구 29호 2001년 여름>



[2006-11-22 22:33:00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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