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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 2001년 5월 21일, 안도현
작성자 : 관리자 


물 끓이기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요즘 사람들은 끓어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참고, 겁이 많아 지레 몸부터 도사리고, 지은 죄가 많아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불의를 보고도 용기가 없어 외치지 못한다. 도대체 열받을 줄 모르고 살아간다. 언뜻 보면 모두 화평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며 사는 듯하다. 시인은 그래서 더 열받는다. '열받는다'는 신세대 언어를 이순(耳順)의 시인이 열받았다는 뜻이다. 격정 없이 굴러가는 이 세상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다는 뜻이다.<안도현>



[2006-11-22 22:33:48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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