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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의 기억 - 시 격월평, 현대문학 2001년 5월호 567호, 이희중
작성자 : 관리자 


시인들이 사는 마을에는 지난 겨울 내린 눈이 아직 다 녹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는 지난 겨울에 눈이 많이 오기도 했다. 평생 그렇게 많은 눈이, 그렇게 자주 내리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지난 두 달 사이 나온 문예지들의 신작시란은 온통 눈 잔치다. 지난해와 올해에 걸친 겨울에 이 땅에 눈이 매우 많이 내렸다는 사실을 후대의 기상학자들은 문예지들만 훑어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인들은 물건들, 물상들, 삼라만상을 들여다보며 해탈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의 명민한 눈들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곤 하던 그 희한한 기후를 놓칠 리가 없다. 그때 그 눈 속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오래 전부터 겨울을 남달리 좋아해 온, 남쪽의 어떤 시인은 눈이 내리는 날 바닷가의 횟집을 찾아간다. 그는 술을 마시고 싶었다고 말하지 않고 짐짓, [하늘 땅이 맞물리는 지평선에는/가고 싶은 보고 싶은 것들도/한꺼번에 맞물려 가물거릴지,/문득 그 지평선에 가고 싶었다]라며 말머리를 든다. 눈이 많이 내리면 먼 곳을 보기는 어려운 법. 지평선은 말하자면 나를 중심으로 보아 땅의 먼 끝일 텐데 하필 눈 내리는 날 지평선을 보겠다니. 그의 무모한 기도는 기필코 실패했을 것이다.

  그렇구나 여기말고도 이 세상에는
  지평선 아닌 데가 없겠구나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천지사방에 다 가물거리겠구나

  문 닫는 것도 잊어버리고
  눈보라가 넋 놓고 가물거린다
  이 세상 천지사방에
  눈이 멎을 것 같지 않다



  ―정양, 「지평선」(『창작과비평』 봄호), 끝 부분

  그는 눈 때문에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찾다가, [지평선이 가물거린다], [보고 싶은 것은 가물거린다]라는 두 진술에서 [모든 보고 싶은 것은 지평선이다]라는 명제를 끌어내는 이상한 삼단논법을 구사한다. 그래서 [여기말고도 이 세상에는 지평선 아닌 데가 없겠구나]라고 말하게 되었다. 시인은 그래도 되며 시인이 아니더라도 눈 오는 날에는 그래도 될 법하다. 그는 시인인데, 눈까지 내리고 있다. 이제 눈[雪]조차 가물거리는 판국에, 마지막 말 [눈이 멎을 것 같지 않다]는 어둡고 흐리고 긴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가물거리는 것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외에도 많은 좋은 시를 읽었다. 새로운 빛을 발하는 임영조, 송수권(『21세기문학』 봄호 외), 이재무(『문학동네』 봄호), 이상희(『세계의문학』 봄호 외), 장옥관, 박형준의 시편들(이상 『작가세계』 봄호), 여전히 넉넉하고 따뜻한 고진하의 시편들(『현대시학』 4월호 외), 더 넓어지고 깊어진 최정례(『시안』 봄호), 강윤후의 시편들(『현대시』 3월호),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정착시킨 유승도의 시편들(『작가』 봄호 외),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눈길을 자랑하는 김은경의 시편들(『실천문학』 봄호), 그리고 이상스럽게 선정적인, 그러나 꼭 그것만은 아닌 김록의 「관능 속에서의 멈춤」(『포에지』 겨울호) 등을 따로 기억해 둔다.



[2006-11-22 22:34:18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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