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화가>의 신화적 여건

                                                                                         정   양

  삼국유사의 수로부인 시리즈는 후대인들에게 다양한 상상과 억측을 불러일으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릉 태수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는 남편을 따라나서게 된 수로부인의 수난과 그에 따른 에피소드를 간략하게 기록해 둔 것이 수로부인 시리즈다. 남편을 따라나선 여행길에서 수로부인이 겪는 그 수난이라는 게 이무기나 용왕 같은 신물(神物)들에게 납치를 당했다가 풀려나는 일이 주 사건이고, 바닷가 절벽 아래에서 점심을 먹다가 소 뜯기던 노인으로부터 꽃을 선물받는 것이 그 에피소드다.

  계곡의 이무기에게 납치당했다가 풀려난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 없이 그냥 풀려났다고만 적혀 있지만, 바닷가에서 용왕에게 납치당했을 때에는 풀려난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남편 김순정공은 납치당한 아내를 되찾기 위하여 먼저 길 가던 노인에게 자문을 구한다. 노인은 "뭇사람의 입은 쇠라도 녹이는 법이라"고 그 방법을 암시하고는 이내 사라진다. 남편은 노인의 암시에 따라 사람들을 모아서 바닷가 언덕을 몽둥이로 두두리며 입을 모아 용왕을 위협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리하여 겁을 먹게 된 용왕이 슬그머니 수로부인을 풀어주었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납치 및 성폭력의 주범인 이무기나 용왕이 어떻게 응징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그들을 응징하고자 하는 의지도 이 이야기는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용왕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나온 수로부인의 몸에서 아름답고 신비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는 그 사건의 마무리 솜씨를 보면 응징은커녕 그들의 그러한 범행이 오히려 미화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내의 순결이 짓밟히는 현장을 목격한 뒤 그 사실을 노래로 폭로하면서 짐짓 미친 척하는 춤까지 곁들이어 거리로 나서던, 가무이퇴( 歌舞而退)하던 처용의 경우를 잠깐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성폭행을 노래로 폭로하고 미친 척 춤을 추면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던 처용의 그 가무(歌舞)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동정을 사게 되었을 것이다. 그 관심과 동정은 성폭행의 주범을 비난하는 여론이 되고 여론에 몰린 역신은 마침내 공개사과를 하고 물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처용과 순정공의 공통점은 우선 두 가지가 짚인다.  이무기나 용왕이나 역신 같은 神物들에게 순결을 짓밟힌 아내의 남편이라는 점과, 뭇사람의 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하여 노래를 불렀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여러 가지다. 처용은 혼자 노래를 불렀고 순정공은 여럿이 노래를 불렀다. 처용의 노래는 창작곡이고 순정공의 노래는 데모 용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였다. 처용은 노래를 통하여 폭로와 하소연을 했고 순정공은 직접적으로 위협을 했다. 처용은 아내보다 아내의 순결이 소중했고 순정공은 아내의 순결보다 아내가 소중했다.

  짓밟힌 순결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아내만을 소중히 여기던 남편 때문이었을까. 사건 이후 더욱 아름다워졌을 뿐인 수로부인은 오히려 그 납치와 폭행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은 혐의가 짙다. 수로부인에게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적 수치심이나 가책이나 원망이나 분노 같은 게 전혀 없다. 수치심이나 원망이나 분노는커녕 수로부인은 한 수 더 떠서, 절벽에 피어 있는 꽃을 보면서 누가 저 꽃 좀 꺾어다주었으면 좋겠다고,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딴청을 부린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냥 해보는 혼자소리였다.

  꽃이라는 게 곧 식물의 생식기이기 때문일까. '꽃을 꺾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편화되어 있는 성행위의 상징이다. 이무기나 용왕에게 납치당했던 일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납치사건 이후로 아름다운 향내가 나고 더 예뻐졌다는 사실은 수로부인이 그 납치를 즐겼을 것이라는 짐작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다. 수로부인은 정말 바람끼가 많은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점심을 먹다가 문득 그 타고난 바람끼에 사로잡힌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듣거나 말거나 그냥 해본 그 혼자소리를 귀담아들은 이가 마침 있었다. 하필이면 소 뜯기던 노인이었다.       

      자주색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으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향가 헌화가로 알려져 있는 이 두 줄짜리 노래는 실은 뒤의 한 줄만이 노래 내용이다. 앞의 한 줄은 그 노래에 임하는 상황설명이다. 아니, 뒤의 한 줄도 노래라기보다는 바람끼에 사로잡힌 수로부인에게 소 뜯기던 노인이 건네보는 단순한 수작에 불과한 토막말이다. 바람끼에 사로잡힌 수로부인에게 수작을 건네보는 사람이 젊은이도 아닌 노인네라는 사실이 이 이야기의 신화적 여건을 만들기 시작한다. 젊은이도 감히 오르기 어려운 그 절벽을 소나 뜯기면서 고작 주변노동에 매달려 사는 노인네가 곧바로 기어올라가 꽃을 꺾어다가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대목에 이르러 사람들의 상상과 억측들이 난무한다.

  그들 중에서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그 노인을 신선으로 여기는 상상과 억측이다. 암소를 끌고 있었으므로 그 신선은 도교적 신선이라고까지 신선의 출신성분까지 헤아리고들 있다. 정말 그런가. 그 노인이 신선임을 전제로 서정주 같은 이는 우리의 수로부인이 동서고금의 문학작품들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지상의 이무기나 바다 속 용왕이나 천상의 신선까지 우주적으로 동원되어 그 아름다움을 탐내는 여인이라고, 삼국유사의 수로부인 시리즈는 수로부인의 미모를 강조하기 위한 수준 높은 수사학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정말 그런가.    

  수로부인이 대단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물론 나도 견해가 같다. 그러나 이무기나 용왕이나 노인에 대한 그런 식의 상상과 과장과 억측에 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더구나 삼국유사의 수로부인 시리즈가 수로부인의 미모를 강조하기 위하여 초점이 맞춰진 고도의 수사학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서글픈 배반감마저 느껴진다. 우리의 옛노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옆구리에 술병을 끼고 있으면 주신(酒神)이고 악기를 끼고 있으면 악신(樂神)이고 소와 함께면 도교적 신선이고 하는 식으로 걸핏하면 무턱대고 그들을 신격화하는 것은 그 노래의 신화적 여건을 무참히 잠식하는 이지고잉인 것만 같다.

  젊은이도 오르기 어려운 절벽에 곧바로 기어오르는 그 노인을 쉽사리 신선으로 여기는 것은 이 노래의 신화적 여건을 무참히 잠식해버리는 짓이다. 그 노인이 정말 신선이었다면 그 신선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다 준 이 사건은 그다지 놀라울 일도 신비한 일도 감격스러운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벼랑에 핀 꽃을 꺾어다주는 일쯤은 신선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신선 아닌 사람이, 그것도 힘없는 노인이 누구도 못 오를 것만 같았던 그 벼랑에 올라가서 꽃을 꺾어다 바쳤을 때 비로소 놀라움과 감격이 형성되고 그 놀라움과 감격을 근거로 신화적 감동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신선도 아닌 힘 없는 노인이 어떻게 그 벼랑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를 의심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딱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bed-king이나 그 부류의 귀족들을 이무기니 용왕이니 하면서 슬쩍 신분을 가려야만 했던 설화적 필연성, 그들과 수로부인과의 성적 교유가 일상화되어 있었던 여건 등을 감안하면서 우리가 이 노래에서 새삼 되새겨야 할 대목은 우리의 순정공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노가바를 만들고 데모를 주동하여 드디어 아내를 되찾게 된 현실이다. 설화생산자들이 그 신분을 슬쩍 가려야만 했던 그들 bed-king과 그 부류의 귀족들이 염치불구하고 다투어 탐을 낼 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이던 수로부인, 염치불구하고 덤비던 그들로부터 그 수로부인을 되찾은 데모의 주역들에게 이제는 다른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로 아름다운 여인이 이제는 그들 곁에 있고 그들이 그 여인에게 '꽃을 꺾어다 바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향가 <헌화가>는 민권의 승리를 자축하는 그런 감격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 감격 그 축제적 분위기, 그리고 수로부인의 그 미모 앞에서 어느 노인인들 '꽃을 꺽고' 싶지 않겠는가. 어느 노인인들 그런 벼랑쯤 기어오르지 못하겠는가.

  고관대작들이 염치불구하고 다투어 탐을 낼 만큼, 짓밟힌 그의 순결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람들이 여길 만큼, 소나 뜯기는 힘없는 노인으로 하여금 힘을 솟구치게 하여 벼랑을 올라가게 할 만큼 수로부인은 정말 매력적인 여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수로부인 시리즈는 그렇게 성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되찾은 민권을 자축하고자 하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이야기 같다. 설화나 노래의  등장인물을 걸핏하면 신격화해버리는 관행 속에는 그 설화나 노래의 신화적 여건을 잠식해버리는 아슬아슬함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이 <헌화가>를 통하여 거듭 강조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