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과 「초혼」

  학창시절에 나는 한 번도 수학여행을 가본 일이 없다. 돈이 없어서 못 가긴 했지만 나는 그게 안타깝기보다는 그 기간에 학교에 안 가도 되는 것이 훨씬 맘에 들었다. "가보면 뭐하나, 가봤자지" 싶은 그 허망한 생각 때문에 나는 지금도 어지간하면 여행에 나서지 않는 편이다. 국내의 유명한 관광지도 가본 곳이 몇 군데 안 된다. 별수없이 여행을 가게 되더라도 볼거리의 눈요기를 하러 다니기보다는 죽치고 앉아서 못 두는 바둑을 두거나 술자리를 기웃거리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다.

  내가 부여의 낙화암에 처음 가게 된 것도 마흔이 넘어서였다. 학생들의 MT에 따라가서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명소가 수두룩한데 무슨 인연인지 그 이후로 우연찮게 무슨 계모임이니 무슨무슨 세미나니 연수회니 하는 일들 때문에 그곳에 몇 차례 더 다녀왔다. 그곳에 갈 때마다 삼천 궁녀가 낙화암 절벽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날려 집단자살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문득문득 의심스럽고,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까닭 모를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사무치곤 했다.

  낙화암 절벽 주변에는 기념사진 찍는 이들이 많다. 일행들이 저 아래 백마강으로 내려간 뒤에도 나는 번번이 낙화암 절벽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영락없이 셔터만 눌러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천천히 잘 박아달라고 농을 걸어오면서, 사진찍는 이들은 저희끼리 실없이 키득거리기도 한다. 사진을 찍고 난 뒤에는 절벽 끝에 서서 만만한 돌멩이를 골라 백마강을 향하여 몇 차례씩 힘껏 던져보는 이들도 많다. 아무리 힘껏 던져보아도 백마강에 빠지는 돌멩이는 물론 없다. 실로 어림도 없는 거리다. 돌멩이들을 던져보면서 그들은, 삼천 궁녀가 저 아래 백마강으로 몸을 날려 빠져죽었다는 옛 얘기가 어이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그렇게라도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낙화암이 화제가 될 때마다 궁녀의 숫자를 의심하는 이들도 많다. 의자왕의 궁녀들 중에서 삼십 명 정도의 궁녀가 몰락한 왕조를 위하여 그렇게 집단자살을 했더라면 살아남은 백제의 억울하고 부끄러운 유민들에게 그 의거는 커다란 충격과 분노와 그리고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그들 개개인의 이름이 낙화암과 더불어 청사에 빛났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삼십 명 정도의 궁녀만으로도 그 의거의 사회적 역사적 효과는 충분한 것이다. 만리장성이나 불로초로 유명한 진시황의 아방궁에도 궁녀의 숫자가 오백 명 정도였다는 데 삼천 명이라는 숫자는 해도 너무한 숫자임이 분명하다.

  누가, 왜, 무엇을 근거로 그런 거짓말을 만들어놓았는지 확실히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백제의 유민들이 지어낸 말 같지는 않다. 몰락한 왕조와 운명을 같이하지 못한 부끄럽고 억울한 백제의 유민들이 궁녀들의 의거를 통하여 자기네 부끄러움이나 억울함을 다소 달랠 수는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궁녀의 숫자 따위나 불리어 몰락한 왕조의 화려함을 강조하고 싶은 유치한 유민은 없을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 리 없다. 그때 그곳에서는 삼천을 헤아리는 수많은 백제의 아녀자들이 마지막 피난처였던 부소산 일대에서 그야말로 꽃 떨어지듯 죽었을 것이다. 봄 한철 낙화암 주변의 짓밟히는 꽃잎처럼, 수많은 백제의 아녀자들이 백마강을 건너온 나당연합군에게 무참히 짓밟혔을 것이다. 더러는 절벽 끝으로 내몰리어 떨어지기도 했을 것이고 더러는 백마강가로 밀리어 아닌게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던진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 근처의 수많은 사람들이 또 그렇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부소산 일대에서 벌어졌을 나당연합군의 만행과 그 참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한다. 한국군과 미군이 월남의 아녀자들에게 자행했던 만행과 무자비한 양민학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당연합군에게 짓밟힌 그 백제의 아녀자들 중에는 어쩌면 궁녀들도 섞이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낙화암에서 많은 궁녀들이 죽었다는, 그들은 짓밟힌 게 아니고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는, 그들의 숫자가 삼천을 헤아린다는 소문을 듣고 백제의 유민들은 아마도, 궁녀가 그토록 많은 나라였다면 그까짓 나라, 망해 버리기를 차라리 잘했노라고 그들의 죽음을 오히려 위로삼았을 것이다. 궁녀가 그토록 많은 나라를 위하여 서러워했던 자신들을 오히려 부끄럽고 억울하게 여겼을 것이다. 누가 그런 소문을 날조하여 퍼뜨렸는지는 참으로 자명한 일이다.

  소정방의 기념비가 서고 맥아더 동상이 의연히 서 있는 나라, 이 땅에서는 나라 잃고 짓밟힌 백제의 아녀자들이 궁녀였듯이 동학농민군들은 화적패였다. 왜정 때 독립군들은 비적 혹은 마적떼였다.l 제주도에서 거창에서 지리산에서 노근리에서 수없이 떼죽음을 당한 양민들은 빨갱이였고 광주항쟁을 주도하다가 죽어간 열사들은 폭도였다. 궁녀나 화적패나 마적이나 빨갱이나 폭도들 같은 이 나라의 억울한 떼죽음들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곳이 바로 부여의 낙화암이 아닐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들에게, 징기스칸이나 누루하치의 군사들에게, 그리고 백아더의 군사들에게 이 나라 방방곡곡의 아녀자와 양민들이 무참히 짓밟혔던 일들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곳이 바로 부여의 낙화암과 백마강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곱씹으면서, 기념촬영하는 이들의 셔터를 눌러주면서, 그때마다 나는 소월의 「초혼」의 그 절망적 열정이 막연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어만 보이는 낙화암 절벽에 서면 '산산히 부서진 이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들이 이제는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어찌 낙화암이나 백마강뿐이랴, 장백산이나 지리산이나 무등산이나 한라산의 줄기줄기마다, 압록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의 구비구비마다 '사랑했던 그 사람'들의 넋들이 방방곡곡에 사무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