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전에 촛불을 켜지 마십시오

  내 주변에 석정(夕汀)시인과 가까운 이들은 많아도 나에게는 평소에 그를 가까이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고은씨가 연전에 어느 일간지에서, 나를 보면 석정 선생 생각이 난다고 밑도 끝도 없는 글을 쓴 적은 있지만 내 생각에는 얼굴 생김생김은 말할 것도 없고 키만 해도 나는 좀 어색하게 껀정해 보이고 신석정 시인은 보기 좋게 훤칠한 편이다. 석정 시인과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석정 시인에 관한 몇 토막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어서 차제에 그 기억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내가 석정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내 문학청년 시절, 1966년의 어느 늦가을, 지평선과 수평선이 번갈아 가물거리고 돛단배 두어 척이 한가롭게 떠 다니는 동진강 하류를 건너, 야트막한 야산자락에 자리잡은 전라도 부안읍 변두리의 어느 시골마을에 찾아가서였다. 동료교사들과 함께 동료교사 아버님의 회갑을 축하하러 간 길이었다. 흐트러진 풍물소리를 따라 들어선 잔칫집에는 신나는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열 대여섯 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주축을 이루어 한데 어울린 춤판이었다. 춤판에 둘러선 구경꾼들은 객지에서 온 축하객들 같았다. 더러는 구경꾼들도 그 춤판에 끼여들곤 했다. 장구소리, 꽹과리소리, 징소리 들이 서로 따로따로인 채 어쩌다 한 번씩 맞아돌아가는 마구잡이 풍물 솜씨에 춤 솜씨들도 가지가지였다. 곱사춤, 도굿대춤, 엉덩이춤, 허리춤, 어깨춤, 어떤 이는 빙글빙글 양춤을 추기도 했다. 징채를 내던지고 춤을 추는 이, 춤추다 말고 꽹과리를 뺏는 이, 장구 치다가 구경꾼들과 함께 뱃살을 잡으며 웃는 이…… 그 마구잡이 춤판에 손바닥으로 땀을 훔치며 웃어대는 어깨춤을 추면서 석정 시인이 섞여 있었다.

  동료 교사 하나가 저 분이 신석정 선생이라고, 이 댁 친척이라고, 옛날에 우리 학교(당시 김제 죽산고등학교)에 근무하신 적도 있다고 풍물소리로 멍멍해진 내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알려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동안에 우리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이 석정 시인이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너 이놈, 여그는 웬일이냐" 내가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그는 거친 손길로 내 얼굴을 감싸쥐고 내 입술을 마구 빨았다. 수염이 까슬까슬했다. 술냄새 땀 냄새로 숨이 막혔다. 술김에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 한 분이 그를 다시 춤판으로 끌고 갔다. 엉겁결에 입술을 빼앗기긴 했지만 마구잡이 풍물소리가 더 정겨웠다. 징소리가 술 냄새처럼 몸에 감겼다. 내가 어리둥절하든 얼얼하든 상관없이 석정 시인은 또 어떤 할아버지와 손을 맞잡고 신이 나서 흥청거렸다.

  예나 이제나 전라도 부안의 저녁놀은 유난히 아름답다. 누룩냄새가 입안에 쩍쩍 앵기는 잔칫집 술맛 때문에 늦가을의 저녁놀이 더 아름다웠는지도 모른다. 우리 일행이 잔칫집을 나서는 마을 어구, 저녁놀이 깔리는 어느 무덤 곁에서 우리는 석정 시인을 또 보았다. 아이들의 발길에 닳아서 잔디 뿌리가 다 드러난 마을 근처의 무덤, 그런 무덤 옆에서 머리가 허연 어떤 할머니의 옥양목 치마폭에 파묻혀 그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아니 짐승처럼 목을 놓아 흐느꼈다. 울음소리에 박자를 맞추듯이 할머니는 연신 그의 반백의 머리칼과 들썩이는 어깨를 번갈아 쓰다듬고 다독거렸다. 일행들이 마을을 벗어나 저만큼 들길 속으로 가물거리거나 말거나 나는 그냥 그 무덤 곁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노시인의 입술을 훔치고 싶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노시인은 여간해서 흐느낌을 그치지 않았다. 그 무덤과 마을과 저녁놀을 등지고 떠나는 내 발길에 노시인의 격렬한 울음소리가 어디까지 따라왔다.

  훗날 전주 석정 시인 댁에 갈 일이 있어서 그때 그 할머님이 어떤 분이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한참 동안이나 큰 눈을 껌벅거리며 말이 없었다. 무심코 물었던 건데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한참 만에야 그는 더듬더듬 6·25 때 그 마을에서 숨어 살았고, 그 할머니는 당신이 숨어 살던 집 아주머니였노라고 힘없이 말했다. 그 숨어 살던 때가 '6·25 때'가 아니라 9·28 수복 뒤라는 것을, 입산 도중 검거되었다가 요행히 「촛불」의 애독자인 어떤 국군장교를 만나서 구사일생으로 고향 근처로 숨어들었다는 것을, 6·25와 관계된 그런저런 일로 석정 시인이 한평생 기죽어 지낸다는 사실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괜한 걸 물었구나 싶어 나는 얼른 말머리를 바꾸었다. 내 입술 훔쳤던 일을 그는 물론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웃지도 않았고 더 힘없고 우울해 보였다. 나는 괜한 소리가 자꾸 자꾸 괜한 소리만 물어내는 것 같아서 내심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석정 시인이 돌아가신 지 올해로 27년째다. 첫 시집 『촛불』도 아마 작년이 회갑이었을 것이다. 시집의 나이 회갑이 넘도록 석정 시인의 "촛불"을 서정적·목가적 혹은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희생적 시정신의 상징쯤으로 여기면서 그를 목가시인으로 만든 시집이 바로 이 『촛불』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졸고 「신석정의 촛불」(『사람과 문학』창간호, 1992)에서 밝혀본 바처럼 그의 '촛불'은 끝끝내 켜지 말아야 할, 켜 있다면 서둘러 꺼버려야 할 몹쓸 빛이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제 주변만 겨우 밝히는 인위적이고 폐쇄적이고 잔인한 빛이다. 나라야 어찌 되든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소시민적 근시적 삶의 태도에 대한 자책과 거부와 고통과 혐오감을 석정 시인은 시집 『촛불』에 고심의 음각으로, 그러나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소박하게 새겨놓았다. 그에게 있어 촛불은 아름답고 고귀한 정서적인 것이 아니고 잔인하고 답답한 극복의 대상이었다.

  시집『촛불』속에는 유아적 퍼스나의 배반당한 순진성이 곳곳에 내출혈의 몸부림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슬픈목가』를, 『빙하』를, 『산의 서곡』을 아무리 써보아도 『촛불』을 제대로 못 읽은 이들은 그를 한사코 목가시인으로 못박아 둔다. 목가적 마스크를 쓰고 견뎌야 했던 식민지 젊은이의 한, 파렴치한 독재하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답게 살아보려다 낙이찍히어 별수없이 그 목가적 마스크를 쓴 채 한평생을 기죽어 살아야 했던 장년과 노년의 한, 그것들이 석정 시인으로 하여금 고향의 늦가을의 저녁놀의 무덤 곁에서 격렬한 울음소리로 터져나오게 한 것은 혹시 아니었을까.

  언제였던가는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전주에서 석정 시인 추모행사가 있었다. 아마 이십 년이 넘었지 싶다. 그때 석정 시인의 제자 시인 한 분이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를 조명을 받으며 비장하게 낭송하고 나서, 알고 하는 소린지 모르고 해보는 소린지 "스승님이 생전에 다 못 밝히신 촛불을 이제 저희가 켜겠습니다. 부디 고이 잠드소서"라고 더 비장한 목소리로 덧붙이던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제발 석정 시인의 영전에서만이라도 촛불을 켜지 말아 달라"고 나도 성난 목소리로 덧붙이고만 싶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