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와 자물쇠

인간문화의 한 수치스러운 특징으로서 인간이 열쇠와 자물쇠를 사용한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었던 듯 싶다. 인류의 비극은 그 자물쇠와 열쇠의 갈등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고대의 자물쇠일수록 그 구조가 단순하고,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그 구조는 정밀 복잡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의 자물쇠를 많이 수입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불신의 정도가 가장 확실하게 반영되는 것이 자물쇠의 정밀도라면 우리나라는 그래도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인간불신의 정도가 아직은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좋은 상태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나라의 인간불신의 정도는 이제 우리의 기술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둑이 늘어날수록 자물쇠도 늘어난 것인지, 자물쇠가 복잡해질수록 도둑이 늘어나는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자물쇠들은 점점 더 효력을 잃어간다. 열쇠와 자물쇠로 상징되는 인간 불신의 갈등도 따라서 끝이 없다. 아들이 아버지를, 아내가 남편을 스승이 제자를 정부가 국민들을 못 믿어하는 데서 생기는 비극들을 우리는 무수히 알고 있다.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상인들은 상인들끼리, 관리들끼리, 정치가들끼리, 학우들끼리, 스승들끼리 서로서로 마음을 열어놓을 수 없는 사회...... 생각만 해도 심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설혹 그런 심각한 정도는 아닐지라도 지구촌의 현대인들은 모두 그런 비슷한 의식의 자물쇠들을 필요악처럼 지니고들 살아간다.

인간의 그러한 불신풍조의 결과인지 아니면 인간의 불신풍조에 대한 풍자적 반응인지는 잘 몰라도 인류사는 여간해서 열리지 않는 자물쇠들을 도처에 장치해 놓는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만 두고 보더라도 그런 자물쇠들이 수없이 매달린 채 진행되어 왔다. 테러와 암살과 학살과 행방불명, 사기와 횡령과 투옥과 사형과.......삼팔선이나 휴전선을 축으로 삼은 그러한 자물쇠들은 영 풀릴 길이 없는 것일까?

포도주의 나라 프랑스에는 눈 감고 포도주의 맛만 보고서도 그 포도주의 생산년도와 산지 따위들을 척척 알아 맞히는 별난 포도주 감식가가 있었다고 한다. 하도 귀신같이 알아 맞히므로 사람들은 장난삼아 그에게 냉수를 한 컵 따라 주었더니 그 귀신 같은 포도주 감식가는 그것만은 도저히 생산년도와 산지를 알아 낼 수 없노라고 난처해하더라는 얘기가 있다.

단순한 자물쇠에 대하여 정밀한 자물쇠는 실상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수수께끼들이 대상을 복잡하게 생각해 하는 인간의 맹점을 풍자하는 내용들인 것처럼 우리 역사에 채워진 자물쇠, 삼팔·휴전선을 축으로 삼아 매달려 언젠가는 열리지 않으면 안될 그 자물쇠들도 실상은 아주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믿어 버리는 사람이 모든 사람의 신뢰를 꼭 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아무에게서도 신뢰를 받을 수가 없는 법이다.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믿으면서 살아가자고 유언을 남겼다는 어느 재벌의 당연한 얘기가 요즘 사람들에게는 퍽 쇼킹한 교훈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믿을 수 잇는 단순한 용기, 인간관계의 수많은 갈등이나, 주렁주렁 매달린 역사의 자물쇠들은 그 단순한 용기들을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1982년 10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