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해지는 것들을 위하여

들으면 들을수록 감동되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자주 듣는 감동되는 이야기란 없다. 영원히 맛있는 음식이 없듯이 사람들 입에 지주 오르내려서 유명해지는 것 치고 이내 시들해지고 천해지지 않는 것이란 없는 것만 같다. 양반이나 귀하나 색시나 사모님이나 여사나 박사 같은 것을 예로 들더라도 그것들이 애초의 쓰임새와는 달리 이미 얼마나 천연덕스럽게 천덕스러워지고 있는 중인가? 대궐이나 궁전이나 황제나 임금님이나 전하와 같은 어마어마한 말들도 이제는 겨우 구차한 다방이나 술집 이름 같은 것들이 되어 화려했던 옛 꿈들을 팔고자 한다. 극존칭으로 쓰이던 마누라라는 호칭도 이제는 겨우 술취한 넘편들이 남편의 권위와 어리광을 어정쩡하게 얼버무리는 ?稱으로 통용된다.

몇 십 년 전에는 어른들조차도 사용하기를 낯 붉혀 했다는 남녀간의 사랑이니 연애니 애인이니 하는 말들도 이제는 어린이들의 예사로운 장난말이 되어버렸고, 50년대에 판을 쳤던 자유당 민주당 같은 정당들은 이 땅에 자유나 민주를 루머로만 남겨 놓았다.

자유·정의·민주·복지·평화 같은 금쪽 같은 말들은 지상의 여러나라들이 또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남용하고 있는 중인가? 자랑과 겸손의 양날개를 거느리리고 무불통달로 행세하다가 죽어서 제삿상에까지 오르던 학생이라는 이름도 오늘날 그것이 얼마나 천해질 만큼 천해져 있는가?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어 마침내 천해지고 마는 것들이 어찌 그런 것들 뿐이랴. 꿈이니 청춘이니 낭만이니 추억이니 하는 말들도, 양심이니 지성이니 진실이니 학문이니 하는 것들도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떠들면 떠들수록 천해지고 추해진다. 소중하고 고귀하고 아름답고 아까운 그 모든 것들의 인프레이션이 우리를 점점 더 황폐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목숨이라도 걸어놓고 지켜야 할 위대한 가치, 소중한 꿈, 고귀한 감정, 그것을 위해서라면 간이라도 빼줄 아름답고 아까운 감동들을 사람들이 남용해 버리지 않고 진실로 소중한 것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지닐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보다 넉넉해질 것이다. <1983년 6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