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보다 두려운 것은

이야기라는 것은 그것을 즐기던 사람들의 그 시대의 꿈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옛날 얘기들은 『잘먹고 잘살았다』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꿈이 그처럼 집약되었을 것이다. 잘 살기 위한 필수 선행조건이 잘 먹는 것으로 못 박혀버릴 만큼 이 땅에는 굶주리고 살아야 하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못 박혀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의 얘기가 어떻게든 『잘먹고 잘살았다』로 끝나기 위하여 우리 옛날 얘기들은 그러나 심미적 가치나 소설적 리얼리티가 터무니없이 무시되기도 했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꿈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진실과 가치도 무시될 수 있었을 만큼 그 가난은 절실한 가난이었을 것이다. 살기에 불편을 느끼는 정도의 것이 아닌, 죽느냐 사느냐의 한계를 오락가락해야 하는 가난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한 가난 속에서도 우리 옛날 얘기들은 그 가난을 즐기기도 했다. 그것은 때로 아이러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해학으로 굴절되기도 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 결말을  위하여 설혹 소설적 리얼리티 같은 것들을 무시하기도 했지만 결코 인생의 진실을 포기해 버리지 않는 슬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가난은 어디까지나 극복해야 될 대상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극복의 과정에서 무시하고 포기할 대상이 어떤 것인가를 추구하는 인생 태도들을 대개는 갖추어 지니고 있었다.

요샛 사람들은 그 옛날 얘기들 중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집념만 끈질기게 남겨 놓고 있다. 무시하거나 포기해도 좋은 것들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추구해온 그 인생에 대한 통찰력은 실상은 까맣게 잃어버리고들 사는 것 같다. 그 전통적 가난의 때가 웬만큼 벗겨지고 있는 오늘날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을 즐기고 생활화하던 옛사람들에 비하여 요샛 사람들은 다만 불편한 정도의 가난에 대해서일지라도 너무나들 터무니없이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가난에 대한 그런 터무니없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변절과 배신과 범죄와 같은 비리들을 서슴치 않는다.

불편한 정도일 뿐인 그 가난이 두려워서 저지르는 비리들이 사실은 가난보다 더 두려운 것들이라는 옛날 얘기의 통찰력이 자꾸만 아쉽다.       <1983년 12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