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하여

서울에서 광주에서 대구에서 부산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용서>라는 낱말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고들 한다. 그 <용서>가 이 땅을 바람탄 깃발들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성경 구절대로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한다 하더라도 용서는 얼마든지 필요한 미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면 하루 24시간 동안 거의 3분만에 한번씩 용서해야 되는 숫자라고 하는데 과연 누가 누구를 그렇게 용서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누가 누구에게서 그 용서를 다 받을 수 있을 만큼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 뻔뻔한 사람도 많다. 따라서 그처럼 쓰라린 인내가 또 필요하기도 하리라. 용서란 쓰라린 인내를 필요로 하는 至上의 미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처럼 많은 용서가 필요한 사회는 결코 용서할 사회가 못된다. 그렇게 많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역사는 자랑할 역사가 못된다. 그처럼 많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인간관계는 용서가 오히려 악덕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 용서는 경우에 따라 나약하고 비겁한 이들의 자기보존이나 자기 합리화를 위한 빛깔 좋은 방패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을 쓰라린 배반감이나 치열한 분노에 대한 종교적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이 땅에서 탄생한 103인이나 되는 천주교 성인들은 우리의 자랑이기에 앞서 우리 역사의 치부, 배반과 분노로 얼룩진 치부를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쓰라림 바로 그것이다.

이땅에서 자행되어 인류양심에 얼룩지는 그 치열한 분노에 대하여 교황은 아닌게 아니라 <용서>라는 말밖에 더 이상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나이 든 노인이면서도 영락없이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 같은 티없는 그 모습을 상기하면서 <용서>라는 깃발로 감추어야 했던 그의 티없는 분노는 뜻있는 이들의 가슴가슴에 새삼스러운 충격을 주었으리라. 이 땅에서 자행된 떼죽음과 우리 시대가 감당하고 있는 국제적 만행들에 대하여 상당한 경종과 위안이 되었으리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절망한 뒤에라야 비로소 다만 한번이라도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정말 용서처럼 고귀한 미덕은 없을 것이다. 행여 그 고귀한 미덕을 남용하지는 말자. 그 고귀한 미덕에 마비되지는 말자. 그것이 남용되어 마침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양심도 정의도 지성도 희망도, 그리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사랑과 신뢰까지도 마비되어 버리는 혼돈을 겪어야 한다. 분노도 절망도 없어 용서를 서둘지 말자. 용서란 그것이 마지막 카드일 때에만 진실로 고귀한 미덕일지도 모를 일이다.

<1984년 5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