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 雲의 時調와 역사인식
                                                                                                                        鄭   洋(우석대)

-목 차-

1. 온정적 입장의 순기능과 역기능  
2. 식민지시대 조운의 역사인식
2.1 폭포와 이슬의 만남
2.2 왕조중심의 역사관과 민중적 역사관의 비중
2.3 [古梅]의 눈물겨운 확인
3. 해방공간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좌절
4.  마무리

  1. 온정적 입장의 순기능과 역기능

월북문인들 중에서 월북의 동기나 필연성에 의문이 제기되어 왔던 문인들이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도 정지용, 이태준, 그리고 조운에 대해서는 특히 그 동기나 필연성에 대한 의문이 논자들에 의해서 심심찮게 제기되곤 해왔다. 최근에 어렴풋하게나마 그 행적이 알려져 월북 사실 자체가 의문시되는 정지용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태준과 조운의 경우에는 아직 논의의 소지가 남아 있다. 그들의 월북에 대한 의문은 대개 그들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탈이념적 순수성이나 서정성을 내세워 월북사실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그들을 보호 내지는 변명하고자 하는 온정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온정적 입장은 그들의 예술과 생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실상 장애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

이태준의 경우만 해도 식민지시대에 쓰여진 그의 단편들이 대부분 한국적 정한에 바탕을 둔 서정성 짙은 작품이라는, 그러한 탈이념적 작품들의 경향으로 보아 그의 월북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그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분명히 타당한 것이 못 된다. 식민지시대에 쓰여진 그의 장편 [사상의 월야]는 민족의식의 각성을 주제로 삼은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식민지시대의 이태준의 민족의식의 각성과 해방공간에서 그가 겪었던 사회적 갈등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월북 직전에 쓰여진 그의 중편 [해방전후]를 읽어보면 그의 역사인식과 월북의 필연성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해방전후]는 당시 해방공간에서 한반도의 화두였던 신탁통치에 대하여 그것을 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식인의 고심어린 신념을 확실하게 못질해 둔 소설이다. 그 [해방전후]라는 소설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들은 더러 있지만 그 소설을 통하여 신탁통치에 관한 작가 이태준의 입장이나 그와 관계된 이태준의 월북의 당위를 밝히고자 하는 연구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조운에 관한 연구들도 이태준의 그것과 비슷한 미완의 온정적 궤적을 그어오고 있다. 우리의 시조문화가 그 음악성을 상실하면서 생명력이 쇠잔해질 무렵에 시조의 문학성을 근거로 시조중흥의 길을 닦았던 사람이 육당, 춘원 등이라면 시조문학의 중흥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인물로 흔히들 가람과 노산을 일컫는다. 분단 이후 남한문단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는 했지만 조운은 선배 시조시인들이 채 벗어나지 못했던 유가적(儒家的) 관념의 벽을 허물고 서민적 리얼리티를 성공적으로 시조문학에 도입함으로써 생활시로서의 시조의 새 길을 열어놓은 시인이다. 조운의 시조에서는 우선 정형률이 가져오기 쉬운 부자연스런 이물감이 비교적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시조를 읽고 있노라면 우리말 구어의 호흡과 시조의 묵은 율격이 한 데 녹아서 그것들이 서로 행복하게 동거하고 있는 이름다움을 만난다. 시조가 우리 고유의 예술양식이었던 필연성을 그의 시조들을 통해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우리의 일상적 말버릇들이 시조라는 율격과 어울리어 이루어내는 놀라운 활력은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조운 특유의 사실적 재치와 해학으로 무늬져서 수많은 절창을 시조문학사에 남기고 있다. 조운에 관한 그 동안의 연구들도 주로 조운시조의 그러한 면모에 집중되어 왔다. 그의 다정다감한 성품이나 인간미 넘치는 서정적 태도들이 어떻게 그의 시조 속에 육화되어 시조의 새 길을 열었는가를 밝히는 그런 연구들이 오늘날 조운연구의 바탕을 든든하게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온정적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시조 속에 나타나 있는 민족의식이나 역사감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민족의식이나 역사감각이 부분적으로 언급될 경우에도 그것이 최남선이나 이은상 류의 전통의 부활과 고수를 위한 국수적인 입장의 것이 아니고 보다 개방적이고 서민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연구들이 지배적이다. 더구나 식민지시대의 그의 민족의식이나 서민적 역사감각이 해방공간에서 어떻게 시련을 겪고 마침내 월북으로 이어졌는가를 밝히고자 하는 연구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그가 선택했던 신념과 그의 작품들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여기는 온정적 태도는 그 순기능을 인정받기도 하겠지만 한편 조운의 시조가 탈이념적인 것으로 새겨지는 그 역기능 또한 그대로 간과할 수만은 없는 성질의 것이다.

삼팔선이 그어진 이후 한국전쟁 직전의 월북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 노약자나 어린이는 함께 갈 수 없는 험한 산길이었기 때문에 부모나 어린 자식들을 남겨둔 채로 월북한 이들도 많았다. 경비병들의 눈을 피하여 야음을 틈타 삼팔선을 넘다가 신원불명인 채로 사살당하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월북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월북은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의 안이한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조운과 그의 가족들은 (어머니와 아내와 이십세 전후의 세 아들과 딸 내외) 그 무렵 여러 차례에 걸쳐 따로따로 그 삼팔선을 건너갔었다. 문학인의 신념과 그 작품이 서로 어긋나는 일은 더러 있다.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의 경우 식민지시대의 울며 겨자먹기식 일부 친일문학 같은 것이 그런 예에 해당될 것이다. (자발적 친일문학은 물론 예외다.) 그러나 그 동안 조운 연구자들에 의하여 밝혀진 바처럼 조운은 식민지시대에 부단히 항일운동을 했던 사회운동가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반드시 그의 신념이 표백되어 있을 것이고 그와 가족들의 목숨을 걸고 월북하게 된 필연성이 그의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이제는 밝혀두어야 조운의 시조를 이해하는 일에 도움되리라고 여기는 것이 이 글의 기본입장이다.

이 글은 조운이 남긴 시조 중에서 민족의식이나 역사인식, 그리고 사회적 감각이 살아 있는 작품들(해방이전: [구룡폭포], [선죽교], [고매], [만월대에서], [수영울돌목], [파초], [망명아들], [파란병정] 등. 해방이후: [고부두승산], [석류], [금만경들], [얼굴의 바다], [탈출], [유자] 등)을 주 대상으로 삼아서 그것들 중에서 식민지시대의 작품([구룡폭포], [선죽교], [고매] 등)과 해방공간의 작품으로 나누어 각각 분석해봄으로써 월북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고 있는 조운의 역사인식의 양상과 그 상관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2. 식민지시대 조운의 역사인식

2.1 폭포와 이슬의 만남

    사람이 몇 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劫이나 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江도 바다도 말고 玉流 水簾 眞珠潭과 萬瀑洞 다 고
    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 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맻혔다가 連珠八潭 함께 흘러

    九龍淵 千尺絶崖에 한번 굴러보느냐     

                                [구룡폭포] 전문

조선조 후기에 외설(猥褻)을 앞세워 평민정서의 기수노릇을 감당하던 사설시조는 그 외설에 가리어 활로가 막힌 듯이 여겨지던 장르였다. 그 사설시조가 조운에 이르러 이렇듯 새 길이 열린다. 윤곤강의 조운시조집 서평 이후 이 [구룡폭포]는 조운의 시적 성취를 말하는 이마다 손꼽는 시조인데, 여러 가지 화려한 찬사들은 많아도 정작 이 시조의 핵심이랄 수 있는 '폭포' 와 '이슬'의 이미지에 대한 당연한 접근이 외면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조의 초장에서 화자는 지금 구룡폭포에 쏟아져내리는 물이 부럽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사람들은 옛부터 물이 지니고 있는 순리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만물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정화시키고 자기를 낮추어 남과 다투지 않는)을 찬양해 왔지만 구룡폭포 앞에 서 있는 화자에게는 물의 그러한 여러 가지 덕은 다 그만두고 오로지 쏟아져내리는 그 격정이 부러운 것이다. 물이 되는 것, 그것도 금강의 물이 되는 것은 현실과 꿈의 거리만큼 멀다. 그것이 몇 생 몇 겁의 거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화자는 그 물이 되고 싶다. 몇 생이니 몇 겁이니 하는 윤회적 상상은 관습적 도입일 뿐 무슨 종교적 의지를 바탕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이 되고 싶은 그것도 금강의 물이 되어 쏟아져내리고 싶은 간절한 그리움의 역설적 표현일 뿐이다. 폭포수가 거침없이 쏟아져내리는 구룡연은 몇 생, 몇 겁의 묵은 그리움을 격정적으로 환기시키는 공간이다.

중장과 종장은 그 내용상 이중적 꿈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물 중에서도 샘물도 강물도 바닷물도 아닌, 오로지 구름과 비와 눈과 서리와 새벽 안개로 빚어진 이슬이 되고 싶은 꿈과, 옥류, 수렴, 진주담, 만폭동, 연주팔담 다 그만두고 오로지 구룡연 천척 단애에 한번 굴러보고 싶은 꿈이 그것이다. 물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금강의 물이 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많은 금강의 물 중에서도 오로지 구룡연의 물이 되어 쏟아져내리고 싶은 꿈은 더더구나 어려운 꿈이 아닐 수 없다. 금강의 물이 되기도 어렵지만 구름, 비, 눈, 서리, 안개 등으로 빚어진 이슬이 되는 것은 더 어려운 꿈이다. 구룡연에 쏟아져내리는 폭포와 이슬과의 만남, 그 꿈이 간절할수록 그 어려움은 더 점층적이다. 그 어려움이 점층적일수록 역설적으로 그 꿈은 더 간절한 것이 되어 '구슬구슬 맺'힌다.      얼핏 보면 이 시조는 구룡폭포의 장엄함에 대한 찬가처럼 읽힌다. 그리고 그러한 일차적 의도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그 속에는 시인의 꿈과 그 역사인식이 보다 농밀하게 맺혀 있다. 앞서 말했듯 폭포는 묵은 그리움을 격정적으로 환기시키는 매체다. 역사적 감격의 자리에 동참하고 싶은 꿈을 간절하게 치밀어오르게 하는 그 자리에 화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슬이 되어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폭포와 같은 그 감격이 조국의 광복인지 혁명인지 아니면 우리네 인생의 우주적 거듭남인지 명확하게 알 길은 없다. 이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가장 여리고 가장 작고 그리고 샘물이나 강물이나 바닷물이 되고 싶은 욕심을 아예 비워버린 가장 순수한 결정체다. 한낱 이슬이 되어 역사적 감격의 자리에 합류하고 싶은 가난하고 맑은 꿈, 그 간절한 꿈이 혀 위에 구르는 流音으로 流音으로 이어져 전편에 구슬구슬 맺혀 있는 것이 이 시조다. 폭포에 휩쓸리어 흔적조차 없어질 그 이슬은 그러나 폭포보다 더 격정적이고 간절하고 아름다운 민중적 의지의 결정체다. 폭포로 형상화된 역사적 감격, 그 격정적 감격은 어쩌면 조국광복이나 혁명이나 우리 인생의 우주적 거듭남에 대한 그 모든 그리움의 총화일 것이다.            

2.2 왕조중심의 역사관과 민중적 역사관의 비중

   선죽교 선죽교러니 발남짓한 돌다리야
   실개천 여윈 물은 버들잎에 덮혔고나
   오백년 이 저 세월이 예서 지고 새다니

   피니 돌무늬니 물어 무엇하자느냐
   돌이 모래되면 충신을 잊겠느냐
   마음에 스며든 피야 오백년만 가겠니

   포은만한 의열로서 흘린 피가 저럴진대
   나 보기 전 일이야 내 모른다 하더라도
   이마적 흘린 피들만해도 발목지지 발목져

                                     [선죽교] 전문(72면)

'오백년 이 저 세월'의 '이 저'는 각각 조선왕조와 고려왕조를 역순으로 가리키면서 선죽교의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환기시키는 지시어다. 실개천 위에 놓인 발남짓한 돌다리 선죽교를 통하여 이 시조는 기행시적 무상함을 곁들이게 하여 고려, 조선 두 왕조의 천년 세월을 회고하고자 한다. 두 왕조의 천년 세월과 선죽교를 '오백년 이 저 세월'로 클로즈업시키는 그 조명법과 말맛이 놀랍다. '예서 지고 새'는 조선왕조와 고려왕조를 역순으로 가리키는 '이 저 세월'이 조선왕조의 멸망까지를 중의적으로 담아내려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첫째 수는 회고적 기행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문자답하는 둘째 수에서도 구어와 정형률이 행복하게 동거하면서 회고적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러나 둘째 수의 세 행이 모두 의문형으로 처리되어 있으면서도 그 내용들은 역사적 확신으로 성큼 다가선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마음에 스며든 피야 오백년만 가겠'느냐는 자문자답과 그 확신은 이 시조가 평범한 기행시조는 아니겠구나 싶은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자아내게 한다.

그 역순의 조명법과 말맛, 그 자연스러움과 역사적 확신과 기대와 긴장은 모두 셋째수의 '흘린 피'로 집중된다. '포은만한 의열로서 흘린 피가 저럴진대' 의 '흘린 피'와 '이마적 흘린 피들만해도 발목지지 발목져'에서의 '흘린 피'가 그것이다. 포은의 흘린 피나 이마적 흘린 피는 둘 다 망국의 한을 곱씹게 하는 매제다. 그리고 '포은만한'의 '만한'과 '이마적 흘린 피들만해도'의 '만해도'는 각각 비슷한 기능의 비교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비교의 내용은 어미활용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 역사상 의열(義烈)의 대명사격이던 포은(圃隱)의 선죽교에서 흘린 피가 '이마적 흘린 피' 때문에 갑자기 왜소해져버리는 이 파격적 비교 속에는 조운의 시대감각과 역사관이 함께 무늬지어 있다. 선죽교 아래 버들잎에 덮힌 실개천이 지금은 말라붙어 있지만 내 어릴 적부터 똑똑히 보았던,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민중들이 흘렸던 피는 겨우 무늬만 남아 있는 포은의 피가 무색할 정도로 선죽교가 놓인 이 개천에 발목 넘치게 흐를 것이라는 이러한 파격적 비교는 흘린 피가 상기시키는 망국의 한을 공통분모삼아 왕조 중심의 역사관과 민중적 역사관의 비중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역순의 조명법과 말맛이 놀랍고 '흘린 피'들에 대한 정사(正史)와 민중사(民衆史)와의 파격적 비교가 놀랍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민지시대에 이런 시조가 쓰여졌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우리를 두근거리게 한다.      

2.3 [古梅]의 눈물겨운 확인

   매화 늙은 등컬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古 梅」전문(38면)

이 시조는 문득,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절규하던 후대의 시인 신동엽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신동엽의 꿈이 격정적이고 직설적이고 간절한 것이라면 늙은 매화나무의 몇 송이 매화꽃은 조운의 간절한 꿈이 정적으로 관조되어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어떤 일, 그것이 항일이든 계몽이든 교육이든, 식민지시대에 조운이 몸바쳐 매달리던 일들은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조직이 무너지고 쫓겨다니던 일, 붙들려 감옥살이를 하던 일,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교육도 계몽도 포기해야 했던 일 등등. 동지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더러는 쓰라리게 배반도 하고 자기안일에만 매달리어 부끄럽고 혐오스러운 소시민들이 되어가고 주변에 모여들던 이들이 썰물처럼 곁을 떠나기도 했을 것이다.

후세의 신동엽처럼 그가 '향그로운 흙가슴만 남고 모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고 싶을 때, 그래도 마지막까지 뜻을 모으고 역경을 함께 견디는 이들이 남아 있을 때, 그 남아 있는 이들을 보면서 그는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아 있노라고 절망적으로 자위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적 자위만은 아니었다. 남을 것만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최종적 신념은 서로 얼마나 눈물겹고 아름답고 벅차는 확인일 것인가. 식민지시대의 어느 이른 봄, 성글고 거친 늙은 매화나무에 몇 송이 피어 있는 매화꽃을 보면서 화자는 그것을 눈물겹고 아름답고 벅찬 신념으로 확인하고 있다. 눈물과 격정과 가슴 벅차는 신념이 드문드문 몇 송이 매화꽃으로 절제되어 피었던 것이다.

 

3. 해방공간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좌절

앞서 얘기된 바처럼 조운의 시조에는 서민적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삼은 인간미 넘치는 서정적 내용들이 많다. 그것은 그의 월북의 필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의문의 근거로 내세우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민적 인간미 넘치는 서정'이 반드시 탈이념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되물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반공을 국시로 삼던 시대에 고착된 사회적 편견일 뿐 문화적 보편성을 유지하고 있는 견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의 구호화를 경계하던 마르크스의 입론이 아니더라도 '서민적 인간미 넘치는 서정', 그것은 사실 탈이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념화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조운은 '인간미 넘치는 서정'을 밑그림삼아 「구룡폭포」나 「선죽교」나 「고매」처럼 예술적 향기가 무르익은 역사인식에 이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런 역사적 신념을 밑거름삼아 서민적 인간미 넘치는 서정의 세계를 형상화하기도 했던 것이다.    

해방공간에 쓰여진 몇 편 안 되는 조운의 시조, [고부 두승산], [금만경들], [석류], [얼굴의 바다], [탈출], [유자] 등은 그의 역사에 대한 믿음을 괄호 안에 묶어두고서는 온전하게 그 문맥이 짚이지 않는 작품들이다.      

     斗升山이언마는 녹두집이 그 어덴고
   뒤염진 늙은이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베트소롬하고 묻는 나만 보누나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철만 여기고서
   일나서 敗했다고 설거운 노래 마라
   오늘은 백만농군이 죄다 奉準이로다.

                             「古阜 斗升山」 전문(160면)

   이 「고부 두승산]은 1947년 3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간행한 『연간조선시집』에 실렸던 시조다. 갑오년의 농민전쟁에 대한 이러한 조운의 관심은 시대를 거슬러 오늘날의 시점에서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광주민주항쟁이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폭도들에 의한 사태'로 찍소리도 못한 채 구겨져 있었고 아직도 그 진상의 상당부분이 암장되어 있는 상태지만, 그보다 몇 곱절이나 더 오랜 세월을 동학 폭도들에 의한 난리, 동학란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어 있던 갑오년의 농민전쟁은 그로부터 반백년도 더 지나서 조운에 의하여 비로소 그 역사적 조명이 시도된 것이다. 갑오년의 농민전쟁은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도 그로부터 거의 일백년 가까이 '동학란'인 채로 기술되다가 최근의 국사교과서들에 이르러서야 이 땅을 휩쓸던 그 피바람을 '동학운동'이니 '동학혁명'이니 하면서 운위하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할 때 조운의 역사감각이 이미 예사롭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이 「고부 두승산]은 「선죽교]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회고취미의 기행시조가 아니다. 전봉준의 생가를 묻는 나그네에게 '고개를 베트소롬하'면서, 물어보는 나그네를 되쳐다보며 대답을 유보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고, 그런 미심쩍음은 최근까지도 의미축소되어 이어져 온 역사적 질곡이다.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에 조운이 이 시조에서 '백만 동학군'이라 하지 않고 '백만 농군'이라고 기술한 것은 정형시의 음수율을 위한 배려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의미축소를 위하여 오랜 세월 의도적으로 강조한 '동학란'의 '동학'이라는 종교적 색깔을 지움으로써 조운은 갑오년 농민전쟁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앞서 「선죽교]에서 확인한 바 있던 민중중심적 역사관이 해방을 건너 이 시조에 그대로 접맥되어 있다. 농민전쟁의 의미축소를 위한 기능으로 혹처럼 매달려 온 그 종교적 색깔을 끝까지 매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의 현대사가 혁명 아닌 것이 분명한 사건들에 대하여 혁명이라는 이름을 헤프게 남발해온 것처럼 갑오년의 농민전쟁을 '동학혁명'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그 헤픈 정도가 지나쳐 부끄러운 왜곡에 가깝다.

   '오늘은 백만농군이 죄다 奉準이'라고 다짐하던 조운의 역사에 대한 믿음은 결코 헛된 장담만은 아니었다. 60년대 후반에 쓰여진 김수영의 「풀」이 민중들의 삶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이후 한국현대시사에 수많은 잡초들이 이 땅의 민초의 얼굴로 돋아나고 있는 것처럼, 조운의 「고부 두승산」을 기점삼아 갑오년의 농민전쟁을 중심 소재로 한 수많은 시와 소설들이 신동엽의 「금강」을 건너 오늘날 그 암장된 역사적 의미를 밝혀내고 있는 중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젖힌
    이 가슴.

         「石榴」 전문(36면)

이 단시조에는 조운 시조의 특성들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바느질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소박하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민중적 삶의 영근 꿈들이 '빠개젖'히는 듯한 긴장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 시조는 이 땅의 수많은 문인과 독자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조운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구룡폭포」에서 '풀 끝에' '구슬구슬 맺혔'던 '이슬'이 여기서는 '알알이 붉은' 석류알로 익어 있다. 폭포와 같은 격정적 감격 속으로 휩쓸리고 싶던 그 이슬이 임을 향하여 '빠개젖'히는 '알알이 붉은 뜻'으로 쏟아지려 하는 것이다. " '임아 보소라'의 그 임이 누구인 줄을 모르고 어찌 조운 시조를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해서 우리는 그를 민족시인이라 부름에 있어 조금도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조운문학전집}의 책머리에 그의 고향 후배인 李乙浩의 소담한 글이 얹혀 있거니와, 식민지시대였다면 그 가슴이 이처럼 '빠개젖'혀지지 않았으리라. 오랜 세월 조국의 광복을 기다려온 순정과 마침내 광복을 맞이한 그 감격이 시조 전편에 '알알이' 넘치고 있다. 광복을 맞이한 민족 앞에 거침없이 '빠개젖'히던 그 열정이 투박하면 투박할수록, 그 순정이 두툴하면 두툴할수록 읽는 이들의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한다.      

    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

   모두 모르는 얼굴
   허나 모두 미쁜 얼굴

   시선이 마주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구나

   전에 보던 얼굴
   오 너도 同志냐
   좇아와 손을 잡고 꽉 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않던 말을 다 했다

              [얼굴의 바다] 전문

이 시조에는 '어느 대회장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그 '어느 대회'는 바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한 제1차 전국문학자대회였다. 조운이 중앙위원으로 참여해 있던 조선문학가동맹이 조직의 강화를 목표로 1946년 2월 8일부터 9일까지 서울에서 열었던 모임이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이 대회에 참석한 서로 모르고 지내던 얼굴,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얼굴, 이름만 알고 지내던 얼굴들이 이제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되어 대회장에서 이심전심의 감격과 열정을 나누고 있는 시조다. "동지애와 격정적 열망으로 가득찬 행동주의자의 모습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이제까지 그의 시조에서 보지 못하던 집단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볼 때, 걷잡을 수 없이 격동하는 해방공간의 현실을 이데올로기의 요구에 따라 형상화함으로써 그의 변신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는 조창환의 설명처럼 이 시조는 서로들 '손을 잡고' '흔들'며 '눈으로 눈으로만/ 않던 말을 다' 하는 감격적 동지애를 확인하는 시조이기도 하다.

    들이 바다도곤 넓어
   눈이 모자라 못보겠다

   이게 우리거지!
   꿈 같은 일이로다

   동진수 구백 구비쳐
   흰젖처럼 흐르고

   황혼은 밀려오잖아
   땅에서 솟나부다

   온 들에 저녁연기
   연기속에 들불 일다

   남양서 북지에서들     
   다들 돌아왔는지

            「金萬頃 들」전문(159면)

6연으로 짜인 이 글은 얼핏 보면 자유시 같고 형식상으로는 두 수의 연시조로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면 첫째수와 둘째수를 구분할 의미단락이 나뉘어지지 않는다. 첫째수의 종장 '동진수 구백 구비쳐 흰젖처럼 흐르고'와 둘째수의 초장 '황혼은 밀려오잖아 땅에서 솟나부다'가 한 의미단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조의 기본틀에 대한 변화를 부단히 모색했던 조운은 이 작품에서 시조의 또 다른 파격을 시도해본 것인지, 지평선과 수평선이 잘 구분되지 않는 드넓은 금만평야를 첫째수와 둘째수가 구분되지 않는 이런 식의 파격을 통하여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금만경 들은 전라북도에 있는 김제와 만경의 넓은 평야지대를 일컫는다. 흔히 금만평야라고도 한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사이좋게 가물거리는 곳이다. 바다보다 넓어보이는 금만평야의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화자는 빼앗겼던 땅을 되찾게 된 기쁨을 넉넉하게 음미하고 있다. '눈이 모자라 못 보겠다'는 구어투는 '이게' 다 '우리 거'라는 새삼스러운 확인을 곁들여,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조국광복의 기쁨을 만끽하는 화자의 충만감을 솜씨 있게 요약한다. '눈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기쁨과 충만감을 표현할 말이 모자랄 지경인 것이다. 하늘에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은 지평선의 황혼, 바라볼수록 가슴 뿌듯한 그 드넓은 벌판을 동진강이 젖줄처럼 흘러 골고루 적시고 자욱하게 깔리는 저녁연기 속에 여기저기 들불이 일고 있다. 남양(南洋)으로 북지(北支)로 끌려갔던 이들이 어서 돌아와 이곳에서 다시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화자는 그들의 안위(安危)가 다소 걱정스럽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급변하는 한반도의 사정이었다. [석류], [고부 두승산], [금만경 들], [얼굴의 바다] 등에 보이는 광복의 감격과 역사에 대한 믿음과 그 기쁨이 온전히 음미되기도 전에 찬탁 반탁으로 국론이 나뉘고 38선으로 국토가 잘리고 조국분단의 고착화 조짐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재 넘은 달그림자 버언한 새 하늘빛
   드문 별처럼 길바닥이 희미하다
   발소리 내 발소리에 놀래 저겨딛고 하노나

   窓에서 窓에서 새는 꿈이 다 다르렸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인애처럼 흐르는 꿈 깰세라
   살어름 밟는 발가락이 가려워

   허위허위 기어올라 재마루를 딛고서니
   냅다 쏘는 붉은 햇살 반갑고 저어워라 내가야
   이렇듯 훤한 날 잡아 이내 돌아오란다.

                                 [탈출] 전문

이 시조의 문면만으로는 [탈출]이 어디서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인지 가늠하기란 수월한 일이 아니다. 거기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적어도 이 시조 안에는 없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더라도 주변사람들은 그 내용을 대충은 짐작할 만했을 것이다. 그 무렵은 [얼굴의 바다]에서 이심전심으로 확인하던 그 동지애와 열정들이 채 발효되기도 전에 지하화되어 있었다. 수배당하고 쫒기고 숨고 달아나야 했던 일들이 어디 하나둘이었으랴. 사람들이 꿈을 깰세라 도둑처럼 걸으면서 자기 발자국 소리에 섬짓섬짓 놀라는 불안감과 살얼음을 걷듯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목적지를 서두르는 긴장감이 이 시조의 전편에 깔려 있다. 떠오르는 아침햇살이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상황, '허위허위 기어'오른 '재마루'의 아침햇살은 그를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렵게 하는 상황일 뿐이다. 아침햇살이 반가운 원초적 감각과 그 밝음이 두려운 현실적 감각이 반대감정양립(ambivalence)의 형태로 초조하게 자리잡고 있다. 화자는 그 초조와 두려움과 혼돈 속에서도 사람들의 꿈이 인애(아지랑이)처럼 흐르는 그 골목길로 다시 찾아갈 것을 약속하고 있다. 초조하고 두렵기만 한 아침햇살이 아니라 진정으로 반가운 떳떳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그가 탈출한 그 골목길을, '窓에서 窓에서 새는 꿈이 다 다'른, '골목에서 골목으로 인애처럼 흐르는' 그 꿈을 다시 찾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는 과연 그 골목길로 돌아왔던가.   

   柚子는 향기롭다 祖國처럼 향기롭다
   이울 줄 모르는 잎에 안게 자랐노니
   가시 城 六百里 두리 漢拏山을 지킨다

   물을 건너오면 탱자된다 하거니와
   물을 건너가면 탱자도 유자 된지
   밤마다 한라산봉우리 별이 불른다노나

                                  「柚子」전문(161면)

이 작품은 {조운시조집}(1947년 조선사)에도 없고 {조운문학전집}의 작품연보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복간된 {조운시조집}(2000년 작가) 시조편의 맨 마지막 자리에 48년 6월 17일이라는 날짜표시와 함께 실려 있다. 기록대로라면 조운의 월북 이전의 작품들 중 마지막 작품이 되는 셈이다. 어디에 발표되었던 작품인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위 인용시조의 표기 중 '안게', '두리', '된지', '불른다노나' 등 오철(誤綴)로 여겨지는 부분들을 이 글에서는 각각 '안겨', '둘러', '될지', '부른다누나'로 고쳐 읽어보았다.

이 시조는 조운의 다른 수작(秀作)들에 비하여 시적 형상화가 깔끔하지 못한 편이다. 얼핏 보기에 '향기'로 연결된 '柚子'와 '祖國'과의 관계가 우선 관념적이다. 한라산의 공간개념 설정도 어색하다. 사계절 푸른 잎을 매달고 있는 유자나무의 리얼리티와, 제주도 주민들의 변함없는 지지와 사랑을 중의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하는 '이울 줄 모르는 잎에 안게 자랐노니'라는 구절도 그 의도를 만족시킬 만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이한 관념화와 어색해진 리얼리티나 공간개념의 문제점들은 읽기에 따라서 월북 직전에 조운이 겪은 상황과 갈등을 어느 정도 해명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을 건너가면 탱자도 유자' 될지라는 기대와 불안이 우선 예사롭지 않다. 이 작품이 쓰여졌다는 48년 6월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이 가결되고 찬탁 반탁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김구 여운형 등이 암살되고 삼팔선이 막히고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석류], [고부 두승산], [금만경 들], [얼굴의 바다] 등에서 보이던 광복의 감격과 역사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지하화되던 무렵이었다. 신탁통치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 단독정부수립이 가시화되어 있던 무렵, 포고령이 살벌하던 미군정청의 포고령 발동으로 감격과 믿음과 기대가 갑자기 시들어 지하로 잠적하던 그 무렵에 제주도에서는 4·3항쟁이 시작되고 십만을 헤아리는 제주도민들이 무참히 학살당하고 있었고 뭍에서는 그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소문만 무성했다. 이 작품이 쓰인 48년 6월은 4·3항쟁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중간쯤 되는 시기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4·3항쟁의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무성한 소문들을 통해서 화자는 제주도의 항쟁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4·3 항쟁 희생자들의 한은 이후에 여순항쟁으로 한국전쟁으로 이어져 왔었거니와,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 시조를 읽는다면 관념적인 유자향기나 어색한 리얼리티나 공간개념이 어렵지 않게 이해될 것이다.

이 시조의 표면상의 문맥대로라면 유자가 그리운 화자(話者)는 스스로를 탱자로 여기고 있다. [구룡폭포]에서 그는 풀잎에 구슬구슬 맺혀 있다가 언젠가 만날 폭포와 같은 감격 속으로 휩쓸리고 싶던 이슬이었다. [석류]에서는 또 가슴을 빠개젖히고 민족 앞에 무르익은 순정을 열정적으로 열어보이던 빛나던 석류알이기도 했었다. 이제는 '물을 건너오면' 유자도 탱자가 되는 불행한 땅, 감격과 믿음과 기대가 지하로 잠적한 땅 위에 그는 놓여 있다. '물을 건너가면' 탱자도 유자가 될지 모른다는 절망적 안간힘으로 화자(話者)는 멀리서 한라산을 그리워한다. 한라산 봉우리가 뭍에서 보일 리가 없다. 한라산 봉우리가 아닌, 한라산 봉우리에 내리는 별빛을 바라보면서 한라산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물을 건너가는 것, 건너가서 '이울 줄 모르는 잎에' 안겨 사는 유자가 되어 '가시 城'을 두르고 한라산을 지키며 조국을 그 향기로 채우고 싶은 화자는 밤마다 한라산 봉우리의 별을 바라보면서 '물을 건너가면 탱자도 유자'될지 반신반의(半信半疑) 하면서 가능성이 희박한 그 희망을 간절하게 곱씹고 있다.

[고부 두승산]이 우리 문학사에서 갑오년 농민전쟁을 처음으로 조명한 작품인 것처럼 이 [유자]라는 시조도 제주도 4·3항쟁과 관련된 최초의 문학작품일 것이다. '이울 줄 모르는 잎에' 안겨 자라는 유자처럼  제주도 주민들의 변함없는 지지와 옹호를 받으면서 '가시 城'을 두르고 한라산을 지키는 항쟁의 주역들(유자)에게 물을 건너가고 싶은 탱자의 꿈으로 멀리서나마 격려를 보내고 그 희생자들의 뜻을 기리고 싶었던 것이 이 시조의 기본바탕을 이루고 있다. 80년 광주항쟁 때는 야음을 틈타 계엄을 뚫고 광주에 들어가서 시민군에 참여했던 이들이 있었다. 계엄의 외곽에서 항쟁의 현장에 뛰어들고 싶어 서성거리며 틈을 노리다가 끝내 뛰어들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바다 건너 제주도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한 단절된 공간이다. 물을 건너가서 한라산을 지키는 유자(柚子)들의 항쟁에 동참하고 싶었던 탱자의 꿈이 삭지 않은 채로 조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여순항쟁을 겪는다. 48년의 조운의 월북은 이 시조의 물을 건너가고 싶던 탱자의 꿈과 아무래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신탁통치에 대한 지식인의 고심어린 신념이 표백되어 있는 중편 [해방전후]가 이태준이 월북하게 된 필연성을 제공해주는 단서인 것처럼, 제주도 4·3항쟁에 대하여 최초로 관심을 보인 이 [유자]도 조운의 월북의 근거를 확실하게 밝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마무리

갑오농민전쟁에 대해서 시대를 앞서 처음으로 문학적으로 조명한 것, 4·3항쟁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먼저 관심을 보인 것, 신재효의 문화사적 위상을 처음으로 밝힌 것 등등이 조운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되새겨져야 할 사항들이지만 그것들은 사실 이 글의 곁가지다. 이 글은 지금까지 월북 이전의 조운의 시조들을 근거로 그가 월북하게 된 필연성을 중점적으로 밝혀보았다. 조운이 다정다감한 해학의 시인이라는 점은 우리 문학사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조운의 시조에는 서민적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삼은 인간미 넘치는 서정적 내용들이 많다. 그것은 그의 월북의 필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의문의 근거로 내세우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민적 인간미 넘치는 서정'이 반드시 탈이념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되물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반공을 국시로 삼던 시대에 고착된 사회적 편견일 뿐 문화적 보편성을 유지하고 있는 견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민적 인간미 넘치는 서정', 그것은 사실 탈이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념화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다정다감함이나 인간미 넘치는 해학들을 탈이념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그에 대한 온정적 견해들은 그런 점에서 그의 시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고 있는 것 같다. 훌륭한 시인의 작품과 그 생의 궤적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따로일 리는 없다. 역사에 대한 조운의 신념과 인간미 넘치는 해학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밑그림이었음을 이 글은 거듭 확인해두고 싶었다. 그것이 조운의 시조를 바르게 읽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식민지시대의 조운은 조국의 광복이나 지역사회문화운동에 더 열정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그의 몸에 밴 서민정신은 민족과 민중에 대한 그의 열정이 육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 글은 [구룡폭포]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조들을 통해서 확인해보았다. 식민지시대부터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조 속에 이어져 있는 일관된 역사인식과 [선죽교]에서 보이는 민중중심적 사관은 훗날 [고부 두승산]을 거쳐 [유자]와 같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대한 믿음과 기대와 그에 따르는 심각한 좌절을 겪는다. 4·3항쟁을 소재로 삼았던 [유자]의 그 좌절과 불안, 폭포에 섞이어 함께 쏟아져내리고 싶던 이슬의 꿈이 [유자]에 이르러서는 물을 건너가고 싶은 탱자의 꿈으로 바뀌어 있거니와, 그 탱자의 꿈이 월북으로 이어진 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월북 이후의 그의 시조에도 서민적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지, 유자가 되고 싶은 탱자의 꿈은 과연 실현되었는지 막힌 세월이 궁금할 뿐이다. (小尾)

 참고문헌

1. 자료
조  운, {조운문학전집}, 남풍, 1990.
-----, {조운시조집}, 작가, 2000.
-----, {조운시조집}, 조선사, 1947.

2. 논저
곽동훈, [조운시조연구], {배달말} 제16호, 1991.
김  종, [조운론], {현대시조} 여름호, 1990.
김주석, [탈출의식과 자유추구], {시조문학} 겨울호, 1991.
노자,   {도덕경},  을유문화사, 1972.
류제하, [다양한 시도가 주는 현대성], {시조문학} 봄호, 1980.
문무학, [조운론], {현대시조} 봄호, 1990.
여동구, [조운시조연구], {청람어문학}, 1993. 12.
윤곤강, {시와 진실}, 정음사, 1948.
이병기, [시조란 무엇인고], {동아일보}, 1926.
이정자, [밝혀진 조운의 면모와 그의 작품연구], {시조문학}, 1996.
임선묵, {근대시조집의 양상}, 단대출판부, 1983.
임종찬, [조운시조와 민족정신], {현대시조} 봄호, 1991.
정  종, [조운의 세계와 그 인간], {시조생활} 가을호, 1990.
조창환, [조운론], {인문논총}, 아주대학교 출판국, 1990.
한춘섭, [운 조주현 시인론], {시조문학} 제43호, 1977. 8.
-----, [조운시조시의 우수성], {시조생활} 제9호, 1991년 여름.
-----, [찾아낸 조운시인의 면모], {시조문학},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