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夕汀의 촛불
                                                                                                                        鄭   洋

-목 차-

1. 머 릿 글
2. 촛불群의 상징체계
3. 夕汀의 전원취향과 역사적 자각
4. 마 무 리

1. 머 릿 글

  오랜 억압 속에서 배양된 민중문화들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소박함 속에 따로 복잡한 주제들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듯이, 일제하에서 쓰여진 夕汀의 초기시들도 그런 민중적 다면성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夕汀의 첫시집 이름이 「촛불」이 아닌 '횃불'이나 '모닥불'이었더라면 당시로써는 상당한 시련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시집 「촛불」의 제목은 얼핏 보기에 그런 사회성이 배제된 靜的, 抒情的 취향의 것이어서 그 자체로는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夕汀의 「촛불」은 그렇게 단순한 정적, 서정적 취향의 이름만은 아니다.「촛불」이 몸에 두르고 있는 서정적 외피를 빛깔삼아 夕汀이 고안했던 일제하의 소박한 목가적 마스크는 「촛불」이 이 세상에 나온 지 반백년도 더 지나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벗겨지지 않은 채 그의 시정신의 입지로 헤아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하의 그의 시에 대한 문단적 단편적 언급들 )에서 비롯되어 최근의 학문적 접근에까지 답습되고 있는 그러한 태도들은 夕汀의 그 목가적 마스크를 끝내 벗겨내지 못한 것만 같은 초조감마저 자아낸다.

  夕汀硏究家들이 거의 빼먹지 않고 인용해 온 "현대문명의 雜踏을 멀리 避難한 곳에 한 개의 에덴을 陰謀하는 牧歌詩人"이라는 金起林의 年評에 정작 유의했어야 될 말은 '피난'이나 '목가시인'쪽이라기보다는 '목가시인' 앞에 놓인 '음모(陰謀)하는'이라는 수식어였다. '꿈꾸는', '그리워하는', '동경하는' 등등의 무난한 용어들을 제쳐두고 '陰謀하는' 이라는 까다로운 수식어를 사용했던 일제하의 金起林의 고심에 관해서 夕汀硏究家들은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평화롭고 한가하고 아름다운 '목가시'와, 어둠과 혼란과 갈등 속에서 아슬아슬한 긴장이 지속되고 있는 '음모하는'이라는 수식어 사이에는 문맥 안에서는 다 소화시킬 수 없는 너무나 큰 거리가 내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金起林이 고심 끝에 짚어둔 夕汀詩의 핵심을 夕汀硏究家들은 하나같이 도외시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夕汀詩에 대한 논의의 발단은 바로 그 도외시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제하에서의 그 도외시는 동료문인들의 우정이 곁들인 동지적 보호막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육이오를 거쳐 말년에 이르기까지 일제하의 고심어린 문학적 陰謀를 도외시당한 채 그 불필요해진 보호막을 끝끝내 두르고 살아야 했던 석정의 사회적 문화적 외로움에 대하여 뒤늦게나마 그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陰謀의 내용을 밝혀보아야 한다.

  이 글은 夕汀을 목가시인으로 삼게 한 그의 초기시들 중에서 대표적 목가시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를 연구의 주대상으로 삼아 그 목가적 마스크를 벗겨보고자 한다. 그 주된 방법으로는 시집 「촛불」에 자주 나타나는 문제의 시어 '촛불'에 관하여 그 상징체계를 점검해 봄으로써, 夕汀의 초기시가 지니고 있는 민중적 다면성을 밝히고 그의 시에 일관되어 있는 시대적 어둠에 대한 그의 역사적 관심을 환기하고자 한다.

 

2. 촛불群의 상징체계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 林 和: <  天下의 시단 일년>「신동아」 5권 12호(1935.12).171쪽「문학의 논리」. 학예      사, 1940.625쪽

      "잠깐 이곳에 주의할 것은 얼른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오, 또 민감한 독자는 곧 반문하리라고 생각하는 사실로 그것은 정지용, 신석정씨 등과 김기림씨등 일견 그 작시 경향이 상당히 다른 두 시인들을 필자가 동일계열하에 취급하는 그것을 것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사실로 여태까지 나는 그들의 작시상의 근본입장인 사상성의 동일성을 가지고 이점의 해당에 충당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은 시적 내용에 대하여 시적 기교를 상위에 놓는 것으로 동일한 지상주의자 들이다.

     둘째로는 그들이 다 같이 현실생활에 대한 관심의 회피자로서 현실아나 자연의 단편에 대한 감각!(결코 감정의 정도에 오르지 않는!)을 노래하는데 있다.

   지금도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앍은 녹색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빛을 즐기느라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서 인제야 저녁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던 물결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의 전원을 방문하는 가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르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全文)

  앞서 말한 바대로 이 시는 1933년 조선일보에 발표되어 夕汀의 첫 시집 「촛불」에 수록되어 있고 김기림의 年評 이후 석정을 목가시인으로 불리우게 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석정의 시에 접근하는 많은 논자들이 그 동안 이 시를 여러 차례 다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잘 짜여진 아름다운 목가시라는 일반적 공감 말고는, 석정이 이 작품에다 공들여 고안해 놓은 속뜻을 따로 얘기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다음으로는 그들은 이러한 결과로서 현실이나 자연에 대하여 단순한 관조자의 냉철 이    상을 시에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靜觀,諦觀,虛無,信仰이 그들의 시적 발전의 순서로, 최대의 靜觀者로 신석정씨를 들 수가 있고 최대의 신앙자로 카톨릭교도 정지용씨를 들 수가 있다."

○ 丁來東 : <신석정시집「촛불」독후감>.「동아일보」,1940. 3. 7.

     "석정의 시는 아름답고 곱고 자연스럽고 보드랍지만 정열이 강하지 못한 점이 좀 유감 이다. 그리고 시형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시험한 점이 보인다.

   「난초」,「서가」,「밤을 맞이하는 노래」와 같은 篇은 그러나 자취가 역력하다. 그러나  이시인은 시형을 그렇게까지 고려할 필요가 없고 산문같이 써도 시가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못 한 가지 나의 바라는 바는 더 심각하게 더 넓게 시의 대상을 확장하였으면 하는 일점에 있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지하는 바 「촛불」은 여느 시집처럼 수록되어 있는 시들 중의 어느 한 작품의 제목으로서가 아니라 수록된 시들 속에 산재되어 있는 '촛불' 이라는 시어 하나를 골라서 시집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석정이 애초에 시집 으름으로 미리 정해 두었다는 「산호림과 백공작」을 뒤늦게 「촛불」로 바꾼 것은, 더구나 일반적인 관행으로 깨뜨려가면서까지 시의 제목이 아닌 특별한 시어 하나를 골라서 시집의 이름으로 정한 것은 그 말의 속뜻을 특별히 드러내보이기 위한 간곡한 고려였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정연구가들은 「촛불」이라는 제목에 대하여 반백년이 지나도록 그의 고심에 값할 만한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다.2)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에는 '촛불'이라는 말이 네 차례 쓰여 있다. 그러나 그 '촛불'들은 모두, 어떠한 음모의 혐의도 거의 서려있지 않은 것처럼 극히 자연스럽게 처리되어 있다. 이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의 이름이 「촛불」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이 시의 제목에서 '촛불'이라는 말이 강조되지 않았더라면 웬만큼 사려깊은 독자라 할지라도 거의 그냥 스쳐지나가고 말아버릴 만큼 자연스럽다. 이 시의 제목이 만일 '황혼'이었다면, 이 시에 일관되어 있는 전체적인 시간배경이 황혼이기 때문에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시의 적절한 제목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석정은 독자들이 자칫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릴지도 모르는 자신의 작시의도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촛불'이라는 시어가 크로즈업되는 이러한 이중장치를 마련해 두었던 것 같다.

                         

  ○ 李秉岐, 白 鐵:「국문학 전사」,신구문화사, 1968. 414∼415쪽

     "암담한 정세하에서 풍자문학이 나온 것은 지금 본 바와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시인작가들을 보면 대체로 그들은 당시의 암흑한 현실에 눈을 돌리는 도피적 태도는 그 일반적인 경향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2)  그동안의 신석정시에 대한 연구 중에서 '촛불'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보인 글들의 핵심적인 부분을 옮겨본다.

  ○ 이재철: <신석정의 「아직 촛불을 켤때가 아닙니다」>,「한국 현대시 작품론」, 1981.문장사.187쪽.

       "이 시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낱말인 <촛불>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사물로소의 촛불이지만 결과적으로 황혼의 아름다운 자연과 대치되는 낱말이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적인 요소를 띄고 있는 것이다. 초록빛이 감각과 성장, 희망의 원형을 갖고 있다면 <촛불>은 어둠, 공포의 원형을 갖고 있다. 바슐라르의 불의 인식으로 볼 때 그가 「불의 정신분석」에서 말한 <자연에 반하는 불 Le feucontre la nature>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자연과 촛불은 대조적 관계로 적어도 석정에게는 여기서 陰陽의 관계,상반의 관계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시인에게서 거부의 대상이 바로 <촛불>인 것이다. 따라서 <촛불>은 그 일반적 이미지로서 인식되는 光明的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쪽에서의 암흑이나 반자연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학 것이다. -중략-

    전체적인 구조는 단순하지만 이미지의 통일,긴호흡의 명상적 리듬,차분한 정서 등으로 자연예찬과 자연을 아끼는 심정이 잘 표출된 전형적인 목가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촛불'들은 이 시에서 밤이 되면 켜지 않을 수 없는, 밤을 견디기 위한 최후의 위안 같은 것으로만 예비되어 있을 뿐 이 작품 자체만으로는 시인의 의도를 충분히 발효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이 시집이 간행되어 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시가 석정의 대표적인 목가시로만 운위되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시를 석정의 대표적인 목가시로만 여기고 있는 독자나 석정연구가들이 그러나 간과해 온 것이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 '촛불'이라는 시어 하나를 골라내어 시집의 이름으로 삼은 석정의 뜻에 충분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들 속의 '촛불'이라는 말에 부여되어 있는 의미를 개개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한 그룹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해 달라는 것이 일제하의 석정이 독자들에게 하고자 했던 간곡한 부탁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작품 자체만으로는 '촛불'의 의미가 충분히 발효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집단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작품에 접근할 때에라야 비로소 이 시의 '촛불'도 제 기능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라는 이 시의 제목이 시집 「촛불」을 통하여 석정이 음모해온 그 시대의 회심의 역사적인 발언이었음도 어렵지 않게 밝혀질 것이다.

  이제 이 시에서 쓰인 '촛불'의 집단성과 그 상징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시집 「촛불」에 동원되어 있는 '촛불'群을 찾아 작품별로 그 상징체계를 점검해 보기로 한다.

   밤과 함께 나의 침실을 지키는
   작은 촛불이 있다.

   그러나 그 촛불은
   밤을 멀리 보낼 수 없는 약한 자이거니 

 ○ 洪仁喆 : <신석정시연구>,경남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6.

      "석정시에 나타나는 대상은 자연에서 연유된 것이 주를 이룬다. 또 밤을 구성하는 구조물이 이미지의 투영에 힘입어 상징적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이 촛불이다. 더욱이, 촛불은 그 자체로서 천정을 향하는 수직성의 몽상을 가지며 존재의 의지를 수렴하는 하나의 초월을 표상한다. 수직성의 이미지는 존재로 하여금 가치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한다. 상상력을 통하여 직립해 있는 사물의 수직성과 일체가 되는 것은 상승력의 상상력에 힘입은 것이며 또한 그것은 아름다운 형태, 스스로의 수직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존재의 세계를 들추어내는 지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중략-

      황혼녁에서 부정의 대상이던 촛불이 어둠의 공간 속에서 그 현현의 행위를 시작한다. 밤이라는 상황은 대낮에 화려하던 살림을 하던 화자와 화자를 포함한 객관적 대상에게 까지 미쳐오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 촛불의 상징적 이미지는 어두운 모든 대상을 소생 시키고 화자에게 부정의 대상을 긍정의 차원으로 상승시키면서 의지의 확대를 꿈꾼다.      또 앞의 시에 투영된 촛불의 현현을 구분해 보면 <1>,어둠을 밝히는 촛불<2>,촛불에 추 방당한 어둠을 받아들임<3>새벽을 밝히는 욕망에 타는 불꽃이다.<1>,<3>이 온당한 빛 어찌 그를 믿고  대낮의 화려하던 나의 살림을 계속할 있을까?
 

   그래도 작은 침실의 좁은 영토를
   혼자 지키려는 잔인한 촛불이여!

   그러기에 문 밖에서는 어둠의 어린애기들이 쭈그리고 서서
   침실을 가만히 굽어보고 있지 않은가?

   너는 새벽처럼 밝지 못하기 때문에
   너의 영토를 확장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추방한
   어둠의 어린애기들을 맞아들이어

   내 살림의 새로 시작하는 새벽이 올 때까지
   그 애기들을 포근히 껴안으려 한다.

   작은 욕망에 타는 작은 촛불이여!
   이윽고 새벽은 네 뒤를 이어 오겠지......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全文)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가 석정의 예술적 사회적 성실성이 성공적으로 조화되어 있는 그의 대표작일 수 있다면 이 시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는 그에 견이 현현하는 촛불이라면 <2>는 촛불과 대립의 이미지를 갖는 어둠을 받아들임으로 빛의 부정을 의미한다. 빛의 현현을 '긍정'으로 빛의 거부를 '부정'으로 대치할 때 촛불은 긍정-부정-긍정으로, 지향이 긍정에서 부정으로, 다시 긍정으로 이르는 과정은 환원적 이미지의 균형을 깨뜨리는 부조리의 시학을 낳게 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의 단계에서 긍정으로 전이되면서 촛불은 밝음의 계시인 새벽으로 대치되는 의미를 나타낸다."

 ○ 宋演淇 :<신석정시의 상징성 연구>조선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5.

     "초록빛이 감각과 성장, 희망의 원형을 갖고 있다면 촛불은 어둠-공포의 원형을 가지 고 있다. 자연에 反하는 불로서 자연과 촛불은 대조적 관계로 인식할 수 있으며 이         시인에게서는 거부의 대상이 바로 촛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촛불도 일반적으로 인식      되는 광명적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쪽에서의 암흑이나 반자연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촛      불인 것이다. -중략- 촛불은 거부의 대상임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정도는 약한것으로 소극적인 상태에머물러 있다.

줄 만큼의 예술적 성실성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같은 작품들에 비하여 인구에 회자되는 비율도 훨씬 떨어진다. 그 근본적인 원인인 아마도 <아직 촛불을…>이나<그 먼 나라…>에 쓰이고 있는 시간개념을 가진 말들이 시적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쓰이고 있음에 비하여, <나는 어둠을…>에 나오는 시간개념을 가진 말들, '밤, 대낮, 새벽'등등은 그 사실성을 충분히 거느리지 못하고 직설적 추상성에 기울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석정의 다른 어떤 대표작들에서보다도 그가 터닦아온 시정신의 입지를 이 작품에서처럼 확연하게 드러내는 작품도 흔하지 않다. 이 시에서 우선 그의 시정신의 입지를 헤아리게 하는 몇 가지 사항을 추려보자.

  첫째로, 시간개념을 가진 말들이 다른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선명하게 시대개념으로 부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석정의 시에 있어서 그런 시간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는 말들은 물론 목가적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게 단순한 사실성에만 머물지 않고 우주적, 원형적,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는 용어들이다. 하루 중의 일회성만을 나타내는 시간개념이 아닌, 우주질서적 추상성으로 확대되어 역사적 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그런 시적태도에 대하여 독자들은 시대의 질곡을 감당하던 석정의 면모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도 있겠고, 그러한 시간개념을 가진 말들에 시적 사실성을 부여하면서 석정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느리고 살아야 했던 목가적 마스크에 대해서도 그 당위성을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석정의 시에서 자주 쓰이는 '밤, 대낮, 새벽, 아침, 황혼' 등등의 시간개념을 지닌 말들에 유지되고 있는 사회적 상상력들은 그의 목가적 마스크를 근거로 삼아 발효된 시대적 통찰의 산물이다. 이 시에서의 '대낮의 화려했던 살림' 같은 것도 이미 단순한 목가적 살림살이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 시인이 인생과 시대를, 그리고 역사를 걸어놓고 그리워할 만한 구도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둘째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에서의 '황혼'과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의 '밤, 대낮, 새벽' 등도 모두 '촛불'을 축으로 삼아 얽혀 있다는 점이다. 석정의 초기 시에 쓰인 대부분의 시간개념을 지닌 말들이 그 사회적 상상력들을 통하여 ' 촛불'의 상징화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는 사실을 이 시는 명쾌하게 밝혀준다.

  셋째로, '촛불'이라는 시어가 이 작품에서 선명하게 그 뼈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의 '촛불' 은 '밤을 멀리 보낼 수 없는 약한 자'일 뿐이며 따라서 믿을 수 없는 빛이다. '제 홀로 좁은 영토를 지키려' 드는 '잔인한' 빛이다. 새벽만큼도 밝지 못한 빛, 그러면서도 '작은 욕망에 타는 작은' 빛이다.

'촛불'에 부여된 이런 부정적 개념들은 석정의 시적 陰謀를 완성하기 위한 요긴한 디딤돌이다. '촛불'이라는 말이 거느리고 있는 외피인 어둠을 밝히는 광명이라거나

                      

   ○ 鄭 洋 :「신석정대표시평설집」, 유림사. 1986. 42∼43쪽.

     "촛불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 통념인 어둠을 위한 광명이나 희생정신 등의 긍정적 개념들은 이 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에서 뜻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이 시에서의 촛불은 인위적인 자위적 유한한 광명이다.

 회생정신 같은 서정적, 긍정적 개념들은 석정시에서 쓰이는 '촛불'과는 거리가 멀다. '촛불' 이라는 일회적, 순간적, 유한적, 인위적 개념에 얽히어 있는 영원한 우주질서의 시간개념들은 '촛불'의 일회적, 순간적, 유한적, 인위적인 속성들이 얼마나한 역사적 모순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보인다. 그 역사적 모순으로서의 '촛불'은 자위적으로 어둠을 견디기 위한 일제하의 안일한 인생태도들에 대하여 사려깊은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고안된 용어다. 그것은 일제의 사탕발림에 대한 , 혹은 당시 지식인들의 감상적, 자위적 자기만족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경고의 의미로도 작용한다. 석정 자신의 소시민적 삶에 대한 자책과 그 고통, 나랏일이나 민족의 쟁래 따위야 어찌되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안락만을 추구하는 소시민적 '잔인함'에 대한 혐오감, 그 고통과 혐오감들을 석정은 ' 촛불'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넷째로, 그 잔인한 '촛불' 주변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어둠이나 '어둠의 어린애기'들에 대한 결연한 관심이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추방한
   어둠의 어린애기들을 맞아들이어
   내 살림의 새로 비롯되는 새벽이 올 대까지
   그 애기들을 포근히 껴안으려 한다.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할 수 없는, 답답하고 유한하고 폐쇄적인 '촛불'을 버리고  소시민적 잔인함으로 역사 속에 내버려진 어둠의 어린애기들을 포근히 껴안고자 하는, 그 시대의 어둠과 그 고통들을 기꺼이 맞아들이어 역사를 함께 감당하고자 하는 話者의 태도는 그것이 단순한 소년적 감상이 아니고 영글 만큼 영글어 있는 지적 굴절의 결과라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잔인한 촛불에게 추방을 당하면서도
   나의 침실을 잊지 않는 충실한 어둠이여

   오늘 밤 나는 너를 위하여 촛불을 끄고
   내 작은 침실의 전면적을 제공하노니

   어둠이여 너는 오늘 밤에도 나는 안고
   새벽이 온다는 단조한 이야기를 계속하겠지?

   그러나 나는 밤마다 네가 속삭이는
   그 '새벽'을 한 번도 맞아 본 일은 없다.

   (대체 네가 새벽이 온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오래되건만…)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全文)

   이 시에서도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에서처럼 비극적 세계인식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우직하리만큼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새벽' 이나 '밤'이나 '어둠' 같은 말들이  '촛불'을 중심으로 얽히어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에서처럼 그 말들이 거느리는 추상성이나 상상력을 바탕으로 ' 촛불' 의 상징화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다시 말해서 '새벽', '밤', '어둠' 같은 말들이 '촛불'을 축으로 삼아 <나는 어둠을…>에서 쓰인 모습 그대로 되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용어들의 용법은 거의 그대로 되새겨지고 있으면서 그러나 <나는 어둠을…>과 <새벽을…>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나는 어둠을…>에서는 '촛불'을 켜 놓은 상황에서의 '촛불'에 대한 자책과 고통과 혐오감들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지만, 이 시에서는 그 '촛불'을 드디어 꺼버리고 어둠 속에서 새벽을 기다린다.

  이 시의 독자들은 우선 '촛불'을 켜고 사는 안일한 인생태도에서 벗어나 시대의 고통 앞에 보다 적나라하게 나서고자 하는 석정의 사회적 태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첩되어 쓰이는 '새벽' 이라는 말이 하루 종의 시간개념이 아닌, 식민지적 시대상황에서 발효되는 추상적 개념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밤마다 네가 속삭이는
   그 '새벽'을 한 번도 맞아 본 일은 없다.

  밤은 있으되 새벽은 오지 않는 세월, 당연히 와야 할 새벽이 그러나 한 번도 오지 않는 역사적 모순, 그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감연히 촛불을 꺼버리고 '내 작은 침실의 전면적을' 어둠(시대적 고통)을 위하여 제공하고 있는 話者듸 용기는 한결 비장하다. 새벽이 오지 않는 역사적 모순에 대한 정면도전인 셈이다.

  새벽이 온다는 어둠의 속삭임은 결코 희망적인 속삭임만은 아니다. 그것은 필사의 절규로 몸부림쳐보아도 단조하고 지루하고 실감이 안 나는, 막막하기만 한 陰謀의 되풀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민지의 백성들은 그 막막한 음모와 몸부림의 되풀이 속에서도 얼마나 끈질기게 그 새벽을 기다려야 했던가,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다는 그 새벽, 그 꿈만 같은 새벽을 그러나 기다려야 하고 그 기다림을 위해서라면 모든 안일한 감상과 자위행위들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고통에 대하여 결연한 용기와 질긴 애정이 필요한 것임을 이시는 강조하고 있다.

   일림아
   촛불을 꺼라.
   소박한 정원에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달빛일
   어서 우리 침실로 맞아와야지……

   유리창 하나도 없는 단조한 나의 방……
   침실아
   그러나 푸른 달빛이 풍요히 흘러오면
   너는 갑자기 바다가 될 수도 있겠지……

   일림아
   어서 촛불을 끄렴
   고양이새끼처럼 삽짝삽짝 저 산을 넘어 온
   달빛은 오죽이나 우리 침실이 그리웠겠늬?

   작은 시계의 작은 바늘이 좁은 영토를 순례하는
   오직 안타까운 나의 침실이여
   푸른 달빛이 해안처럼 흘러넘치면
   너는 작은 배가 되어야 한다.

   일림아
   문을 열어제치고 들창도 추켜올려라.
   너와 내가 턱을 고이고 은행나무를 바라보는 동안
   너와 내가 사랑하는 난초는 푸른 달빛을 조용히 호흡하겠지……

   여봐
   침실의 부두에는 푸른 달빛이 물결치며
   빛나는 여행담을 소곤거리잖늬?

   일림아
   너와 나는 푸른 침실의 작은 배를 잡아타고 또
   어디로 출발을 약속하여야겠느냐?

(<푸른 寢室>全文)

  '일림이'는 석정의 맏딸 이름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의 '일림이'는 석정시에 가끔 보이는 '어머니', '여보' 등과 더불어 가장 가까운 인연의 정다운 대상으로 설정되어 시의 형식을 이끌어가게 한다. 그러나 이 시의 '일림이'와 다른 작품에서의 '어미니' 와는 사실상 상당한 기능상의 차이를 보인다. '어머니'가 話者의 유아적, 소년적 퍼스나에 필요충분조건을 제공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일림이'는 그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세상을 보다 어른스러운 입장에서 되돌아보게 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유리창 하나도 없는 단조한 나의 방'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촛불과 달빛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의 갈등이 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 이 '촛불'도 앞서 얘기된 <나는 어둠을…>이나 <새벽을…>에서처럼 '작은 시계의 작은 바늘이 좁은 영토를 순례하는', 개미 쳇바퀴 돌 듯 하는 무의미하고 단조한 생활, 그래서 '오직 안타까운' 부정적 가치로 설정되어 있고, '달빛'은 '촛불'의 그 유사성과 인위성에 기인하는 부자연함을 극복하게 하는 최소한의 우선적 필요조건으로 긍정적 가치로 추구된다.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달빛', '저 산을 넘어 온 달빛'이 침실(밤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보금자리)을 기웃거리면서도 그 '촛불'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는 중이므로,다시 말해서 '촛불'이 모든 것을 차단시키어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감옥처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어서 그 '촛불'을 꺼버리고 '푸른 달빛'을 맞아들이자. 그리하여 그 푸른 달빛이 침실 안으로 바다처럼 흘러넘칠 때 우리의 침실은 작은 배가 되어 '빛나는 여행담'을 들으면서 어디론가의 새출발을 약속하는 역사에 동참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어둠을 겪고 있는 사랑스러운 다음 세대들에게 어른의 입장이 되어 있는 화자가 간절하게 건네주고 싶은 내용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심각하게 차단되어 있는,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소시민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 역사에의 동참을 호소하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가 '촛불'과 '달빛'의, 인위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 폐쇄적인 것과 개방적인 것, 구속된 삶과 자유로운 삶으로 대비되어 적극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상 네 작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나는 어둠을 껴안는다>,<새벽을 기다리는 마음>,<푸른 침실>)에서 이 글은 '촛불'의 상징적 양상을 살펴 보았다. 위의 네 작품 외에 '촛불'의 상징체계에 동참하지 않는 '촛불'도 없지 않지만 별개의 쓰임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3)

  이제 위의 네 작품에서 '촛불'이라는 말이 쓰인 구절들을 한데 모아 그 '촛불'群의 동질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상, <아직 촛불을…>에서)                       

3) 시집 「촛불」의 상징체계에 동참하지 않는 춧불群

  ○ 돌같이 청수하고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성당에 켠 촛불처럼

     맑고 희게 내가 늙을 때까지

                                                    <「돌」에서>

  ○ 해저와 같이 조용한 날 석양이면

     촛불처럼 조심스런 황혼이 올 때까지

     은행나무 가지에서 작은 산새가 와 쉬고

     산새처럼 외로운 내 마음이 쉬고……

                                                   <「은행나무 선 庭園圖」에서>

   ○ 밤과 함께 나의 작은 침실을 지키는

      작은 촛불이 있다.

   ○ 그러나 그 촛불은

      밤을 멀리 보낼 수 없는 약한 자이거니

   ○ 그래도 작은 침실의 좁은 영토를

      혼자 지키려는 잔인한 촛불이여

   ○ 작은 욕망에 타는 작은 촛불이여     (이상, <나는 어둠을…>에서

   ○ 잔인한 촛불에게 추방을 당하면서도

      나의 침실을 잊지 않는 충실한 어둠이여.

   ○ 오늘밤 나는 너를 위하여 촛불을 끄고

      내 작은 침실의 전면적을 제공하노니,  (이상, <새벽을…>에서)

   ○ 일림아

      촛불을 꺼라.

   ○ 일림아

   촛불을 끄렴.           (이상,<푸른 寢室>에서)

 

  한 데 모아 본 이 '촛불'들이 각각 다른 작품에서 쓰였다 할지라도 그 부정적 기능이 눈에 뜨이도록 한결같다. 그것들은 '작은 욕망에 타는 작은' 존재이고 '작은 침실을 혼자 지키려는 잔인한' 것이고 '밤을 멀리 보낼 수 없는 약한 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켜지 말거나 켜 있다면 어서 꺼야 할 대상이다. 그것들은 모두 '아니다, 말다, 작다, 없다, 잔인하다, 끄다'와 같은 부정적 개념의 말들과 앞뒤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밤'과 '어둠'과 '새벽'등으로 그 부정적 기능을 나누어주고 있다.

  앞서 헤아려 본 대로 시집 「촛불」의 '촛불'群은 모두 일제하의 소시민적 삶에 대한 자책과 거부와 고통과 혐오의 상징이 되고자 한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라는 이른 바 석정의 대표적 목가시에 그런 비목가적 족쇄가 시 제목에서부터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린다면 시집 「촛불」은 그야말로 허망한 작업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에서 보이는, 전원의 황혼을 그려 낸 아름다운 목가시로서의 비중도 결코 만만한 정도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목가적 성실성은 역사에 대한 성실성을 완성시키기 위한 예비적 陰謀였다는 점을 이 시의 제목은 적극적으로 암시한다.

 전원취향과는 상반되는, 그 소시민적 삶을 거부하고 혐오하는 석정의 역사의식은 이 시에서 극적인 긴장을 보인다. 아름다운 전원의 황혼을 최후의 일각까지 이끼고

                    

 ○ 촛불을 켰다 껐다 이 한밤을 새고나니 흡사

    한세상을 살고 난 듯 허둥허이……

    비맞은 난초에는 봄이라도 어리었나 책상 위에

    난초를 다시 놓고 바라보네.

                                                  <「病牀夜吟」에서>

자 하는 목가취향과, '촛불'을 켤 수 밖에 없는 예정된 시대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그것을 거부하려드는 역사의식이 '촛불'을 별빛'으로 대치시키고자 하는 끈질긴 집념으로 맞물려 있다. 석정이 그의 불교적 편력이나 도교적 바탕을 그 나름의 철학과 교양으로 삭혀서 시작업에 반영해 왔던 것처럼, 그의 전원취향 또한 어디까지나 취향일 뿐 그의 시정신의 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작품을 통해서 석정은 그의 독자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이 시의 점층적 화법이 언듯 전원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것처럼 위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어떻게든 '촛불'을 켜지 않으려는 마지막 안간힘들을 아슬아슬한 위기감으로 치닫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 깊은 독자들은 필경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황혼에서 초저녁으로의 시간적 진행과정은 갑작스러운 것이다. 그 촉박한 황혼의 한 때야말로 사실 얼마나 불안한 시간일 것인가. 황혼이나 밤 같은 시간개념이 일제하의 시대개념으로 귀납되는 석정시의 기초상식을 감안한다면 촛불이든 등불이든, 소시민적 삶의 참담한 불을 켤 수밖에 없었던 그 시기에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니다"라고 버텨보던 석정의 시는 비장하고 처절한 역사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에서는 전원적 비중과 역사적 비중과의 무게중심은 그 비장함과 처절함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석정의 초기시에서 두드러진 경향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전원취향은 자세히 음미해 보면 그런 역사적 족쇄가 적지 않게 매달려 있다. '촛불'은 그의 전원취향에 채워져 있는 대표적인 족쇄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의 전원취향에 매달려 있는 그 족쇄들은 사실 난해하지도 정교하지도 않다. 난해하거나 정교하기는커녕 이제까지 살펴본 바처럼 오히려 단순 소박한 솜씨들이다. 1930년대의 시적 수준을 실감케 하는 그 소박한 고안들은 그것이 소박하다는 이유 때문에 외면해도 상관없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절박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를 지니고 있다.

 

3. 석정의 전원취향과 역사적 자각

  시집 「촛불에 게제되어 있지 않은 「촛불」 이전의 그의 초기시에도 그의 전원취향에 대한 더 소박하고 절박한 족쇄가 이미 채워져 있었다. 일종의 역사적 자각이랄 수도 있는 그 작품을 음미하면서 그의 시정신의 입지를 다시 한 번 다지고자 한다.

 

  어머니! 그 염소가 어찌하여 나를 떠받았을까요? 그렇게 순하던 그 염소가 어여뿐 뿔로 나를 떠받은 그 까닭을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즉한 언덕 저-편에 푸른 하늘이 말없이 흐르고 포근한 봄 실바람이 가늘게 그 발자욱을 옮기는 푸른 벌에서 나와 함께 놀던 그 흰 염소가 오늘에 나를 떠받은 것은 그 무슨 까닭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가 없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머-ㄴ 하늘 가에 끝조차 살아서 아스라이 기-ㄴ 江 졸음잡는 물결에  유달리도 따뜻한 햇볕이 미끄럼타던 봄날!

  나물캐는 어머니를 멀리 두고 내 홀로 풀피리 불며 굽어든 江 저-편 언덕 밑 잔물결에 흰 염소의 어지러운 그림자를 보고 놀 때 아아 그 때에도 모르쇠하고 풀만 뜯던 그 염소가 어찌하여 오늘에 나를 떠받았을까요?

  어머니 아무래야 그 염소의 마음을 나는 폭 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그 염소의 목을 얽어매인 것은 그 무엇이며 그를 매어 땅에 말뚝을 박은 것은 그 무슨 까닭일까요?

  목대 밑에 달린 쇠고다리 고다리에 꿰어서 말뚝에 이어 땅에 늘인 굵은 줄!

  어머니! 이 모든 것을 저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생각을 하였습니다마는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이 저로 하여금 이상한 일이 아닐까요?

  어머니!

  저는 또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옛날 故鄕의 나즉한 언덕 늘어진 수양버들 저-편 시내 건너 푸른 들을…그리고 거기서 풀 뜯던 염소의 조으는 눈자위에 말없이 깊어가는 봄과 함께 한없이 깊은 그들의 포근한 꿈을!

  그리고 저녁해 머-ㄴ 하늘에 기울어 기-ㄴ 江 잔물결에 나려 쏘이는 햇빛이 자개같이 남실러리고 저녁때 유달리도 붉게 빛나는 황토배기 언덕 밑에서 해설피 울던 염소의 기-ㄹ게 빼는 엄맷소리가 한없이 아득하게 지금 나의 귀에 올려오는 것 같습니다. 마치 봄 아침 안개 저-편에서 그 소리 들리는 것 같이-

 

  어머니!

  그러던 염소가 그러던 염소가 어찌하여 오늘날 목매어 있으며 그의 눈자위에는 철없는 꿈의 오고가던 그림자조차 사라진 것은 그 무슨 까닭인가요?

  어머니! 그리고 나를 봐야 알은 체도 않고 도리혀 여윈 눈자위로 나를 흘겨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아아! 어머니!

  오늘에 그렇게 초라한 그가 나를 떠받으며 나에게 덤비는 것은 길이길이 잊지 못할 수수께끼 이를까요?

  오! 나의 어머니!

                                           (<어머니! 그 염소가 웨…?>全文)4)

  이 작품은 1929년 11월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비교적 긴 분량의 산문시다. 철없

                

4) 1929년 11월 3일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던 당시의 시를 편의상 현대어법에 준하여 옮     겨 적었음.

는 어린아이의 넉두리처럼 쓰여진 이 작품은 어린아이의 배반당한 순진성을 주조로 전개되고 있다. 석정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시를 이끌어가는 형식적 기능 말고도 그 어린이다운 순진성에 리얼리티를 제공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보다 완벽하게 순진성을 가장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석정이 「촛불」을 전후하여 그의 목가취향의 시들에서 두르고 있던 어린이다운 순진성의 원형이 바로 이 작품에서의 배반당한 순진성이었음을 우선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의 염소는 두 가지 속성을 대표하고자 한다. 하나는 전원적 염소이고 또 하나는 식민지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염소다. '엣날 고향의 나즉한 언덕 늘어진 수양버들 저-편 시내 건너 푸른 들을…그리고 거기서 풀뜯던 염소의 조으는 눈자위에 말없이 깊어가는 봄과 한께 한없이 깊은 그들의 포근한 꿈'을 당연히 연상하게 하는, 평화롭고 한가하고 유순한 염소가 그 하나이고, '목대 밑에 달린 쇠고다리, 고다리에 꿰던 그림자도 사라진', 그리고 함께 놀던 '나를 봐야 알은 체도 않고 도리어 여윈 눈자위로 나를 흘겨보는', 그러다가 마침내 '나를 떠받으며 나에게 덤비는' 염소가 또 다른 하나다.

  걸핏하면 사람에게 덤벼버릇하는 염소의 생리는, 어린아이의 순진성을 통하여 식민지 현실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媒材가 된다. 나를 흘겨보면서 나를 떠받으면서 덤벼드는 그 염소, 그 식민지적 전원감각은 석정이 몸에 두르고 살고싶기도 했던 원초적 전원취향을 심각하게 뒤흔들어 놓는다. 그의 순수한 전원취향에 역사적 족쇄를 채워놓는 것이다. 그런 심각한 족쇄가 미리 걸려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전원은 '먼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위 「촛불」시대에 석정이 살았던 유난히 아름다운 풍광의 전라도 부안땅에는, '삼림지대, 고요한 호수, 흰 물새, 노루새끼, 비둘기, 들장미, 옥수수밭, 꿩, 꿀벌, 새빨간 능금…' 등등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에 동원된 이러한 자연쯤은 어느 먼 나라의 것이 아닌, 서구적 전원은 더구나 아닌, 지천으로 접하게 되는 일상이었다. 그 지천으로 접하던 일상의 자연을 궂이 '먼 나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과 일제하의 석정의 전원감각을 이 염소의 두 속성을 근거로 점검해나가는 것이 속정의 초기시를 헤아리는 지름길이다. 그의 전원취향에 이미 채워져 있는 이러한 족쇄를 짐작한다면, 이상화의 '빼앗긴 들'이 석정에게서는 왜 '먼 나라'가 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식민지의 불우했던 지식인 신석정의 목가적 음모는 실로 이 작품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을 통하여 석정은 그 목가적 음모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유년적 순진성을 두르고 있어야 한다는 방법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순수한 전원취향의 시들까지도 그 음모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해야 하는 시대적 필요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 방법과 깨달음이야말로 그의 배반당한 순진성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그리고 그의 음모를 추진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전원취향의 시들이 담당하는 그 악세사리적 기능이 석정시의 본령으로 오해되는 한이 있더라도, 전원취향의 시들을 악세사리화 하는 「촛불」의 음모를 중단할 수는 없었을 만큼 그것은 식민지 지식인 신석정에게 짐지워진 지난한 십자가였다.

 

4. 마 무 리

  지금까지 이 글은 시집 「촛불」에 동원된 '촛불'群이 일제하의 소시민적 삶에 대한 거부와 혐오와 그 고통으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흔히 석정의 시영역을 초기, 중기, 후기 등으로 나누어 다루는데, 그 초기, 중기, 후기의 시들이 각각 토막나 있는 별개의 것들이 아니고 그가 살던 시대의 모든 어둠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하에서 이루어진 일관된 작업이었음을 밝히기 위한 첫 단계로 이 글에서는 석정시의 사회적 역사적 성격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흔히들 열외로 여기는 그의 초기시를 대상으로 삼았다. 석정의 후기시나 그의 산문에 유난히 드러나보이는 적극화된 사회적 관심들에 대하여는 이 글에서는 보태어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의 후기의 역사적 관심들은 인정하면서도 초기의 목가적 경향을 아름다운 목가시로만 평가하거나, 혹은 석정시의 민중적 다면성을 어느 정도 인정은 하면서도 목가적 비중을 우선시하는 연구들에 대하여 이 글은 '촛불'이라는 용어의 상징체계를 근거삼아 그 재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참 고 문 헌

신석정 : 「촛불」범우사 1982.
석정문학회 : 「신석정대표시평설집」유림사 1986.
이병기, 백철 : 「국문학전사」신구문화사 1968.
허형석 : <신석정 연구>경희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8.
송연기 : <신석정시의 상징성 연구> 조선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5.
홍인철 : <신석정시연구> 경남대 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