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고향 동네에서는 제법 괄목 상대할 사람을 가리켜 <물견>(물건)이라고 곧잘 일컫곤 한다.
예를 들자면, '그 녀석 참 물견이더만!'하는 식이다. 내가 문학 동네에 발을 들이면서 알게 된
물견으로 정양(鄭洋)이란 위인이 있다. 문학이 결코 영예도 보람도 될 수 없는 이 곤고한 풍토
속에서 그간에 내게 안겨진 흔치 않은 소득이 있었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은 물견으로서의
정양일 것이다. 그는 내 가난한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끊임없이 내게 영감을 나누어 주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또 때로는 안 그러는 척하면서 나의 가장 아픈 구석을 섬찟 찔러 주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나는 두엄자리에 앉았다가 꿩을 주운 셈이다.

언젠가 소설가 한승원이 그의 모습을 읽어 보고 나서, 꼭 기린 같은 사내라고 나한테 독후감을 말한 적이 있다. 그토록 자주 접하면서도 그가 기린처럼 생겼는지 버마재미를 닮았는지 도통 관심한 바 없던 나로서는 듣고 보니 딴은 그럴 듯도 하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우선 그는 키가 크다. 6척의 장신인 데다가 본때없이 목마저 길다. 간장종지만한 눈알을 연신 꿈적여 가며 답답할이만큼 느릿느릿 말한다. 긴 팔을 늘어뜨린 채 긴 다리를 이용하여 허청허청 걷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딱하게도 자신이 보기 드문 미남임을 속으로 은근히 자부하고 있다.

외형을 놓고 볼 때는 아닌게 아니라 기린의 사촌쯤 됨직도 하다. 하지만 외형만을 갖고서 일종의 칭찬으로 사람을 기린에 빗댈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두 눈 바로 박힌 한국의 소설가 하나가 설마하니 큰 키와 댕그란 눈알만을 보고서 그렇듯 기린 운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내면일 것이다.

이상의 높은 열매를 넘보는 데 소용되는 건 긴 목과 여리고 섬세한 품성을 아무한테나 함부로 숨김없이 열어보이는 커다란 눈을 가졌다고나 할가. 실상 그는 현실에 전혀 적응할 줄 모르고 야박스런 세태 앞에 번번이 자신을 무방비로 세우곤 한다. 그 유리한 키도 상대방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못하며 남보다 유리하게 타고 난 그 유명한 눈알 또한 적을 향하여 한껏 무섭게 부라리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사내로 태어나기 천만 다행이지 싶을 지경으로 그는 마음이 헤플 뿐만 아니라 숫처녀 같은 수줍음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 수줍음이 시키는 몸을 사리는 버릇이나 뚱한 일면 때문에 가끔씩 그는 그를 약간 알다가 만 사람들로부터 거만하다는 엉뚱한 평판을 받기도 한다.

요컨대 그는 상당히 모자라는 사람이다.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다 못해 반드시 주변에 혹독한 법의 보호가 있어야만이 그럭저럭 처자식 거느리고 호구지책 수소문해 가며 연명해 나갈 사람이다. 만약에 정양이 같은 위인들만 득시글거리는 세상이란다면 나는 손가락 까닥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떵떵 울리게 편히 잘 살아갈 자신이 있다. 목이 길다는 사실은 꼭이나 장점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슬픈 노릇인지도 모른다. 그가 쓴 작품들을 통하여 나는 그의 친구이자 독자로서 그 점을 매우 가슴 아프게 알아차리곤 한다.

밤(어둠) 57, 바람 53, 비 41, 불(불빛, 불꽃) 35, 그리움 31, 눈(雪) 26, 햇살(햇빛) 26, 잠 23, 꿈(꿈자리)22, 피(빈혈) 20, 맨살 또는 체취 17 등등......

워낙 과작인 탓이기도 하겠으나 문단 데뷔 13년 만에야 첫 시집을 내게 되는 소이는 다분히 천성적으로 타고난 그의 수줍음과 결벽증 쪽에 있다고 믿어진다. 사상 유례 드문 출판계의 불황증에 모처럼 선을 보이게 되는 그의 시편들 전부를 재삼 통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주목해 본 것이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시어의 현출 빈도수다.

물론 이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장난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정신 활동의 소산인 작품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그의 시세계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어휘들만 너무 강조함으로써 의미의 맥락이나 이미지의 긴박(緊縛)을 놓치는 우를 범하고, 치밀한 계산하에 절제와 조탁의 산물인 남의 귀중한 작품을 마치 무절제하고 직설적인 설익은 감정의 배설물 바로 그것인 양 착각하게 만들 우려마저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요번만큼은 그런 문제에 막무가내이고 싶다. 누군가가 사용하는 어휘는 그 누군가의 사고의 발로라는, 누군가에게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사용 어휘의 빈도는 곧바로 그 누군가가 지니고 있는 의식 내지는 잠재의식의 편차하고 통한다는 일반론에 근거해서가 아니다. 상대가 다름아닌 내 친구 정양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고질 중의 하나인, 오랜 세월 그를 무던히도 괴롭혀 온,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신체의 일부를 이루는 다른 정상 조직과 마찬가지로 그의 내부에 동거하면서 그의 사랑과 아낌을 듬뿍 받고 있는 고약한 치질의 종류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그것마저도 뻔히 알고 있다. 나는 나대로 굳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정양과 그가 자주 동원하는 시어들 사이엔 그야말로 불가분의 질긴 끈으로 홀맺혀져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위에서 밝힌 그의 시어들을 얽어 유추해 본다면 하나의 설명문이 가능해진다. 하고많은 날 바람 불어 비오고 그리고 눈도 꽤 자주 내리는 밤의 연속을 시인 정양은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며 통과해 나왔다. 이처럼 악천후와 어둠투성이의 인생 역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횟배앓이, 몰매나 혹은 돌팔매질, 시리다, 여위다, 흐리다, 두렵다 등등의 낱말을 다수 차용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가 격동기의 역사를 통하여 몸으로 체득한 진실이란 이렇듯 무참하고 신산스러운 내용일까?

사실 간난 많던 그의 유년을 회억하는 과정에서 밤과 그 밤의 어둠이 주는 의미는 그에게 아주 중요하다. 어둠을 뚫고 집안으로 핑핑 날아들던 마을사람들의 돌팔매를 그는 잊지 못한다. 김제 평야에서 행세하는 대지주이자 개명 양반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6.25 직전까지 꽁깍지가 콩을 삶는 저 비극적인 혼란의 와중에서 좌우익의 사상싸움에 쫓기다가 끝내는 실종되고 만다.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점장이가 예언한 바로 그날 그의 시골집 마당으로 아버지 대신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기어든다. 그 당시 소년의 눈에 비친 광경은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히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는 것이었으며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는 가운데 <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 처절무쌍의 심정이었음을 훗날 그는 담담히 고백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사가 확인된 날을 아버지의 제삿날로 잡아 고향 선산에다 시신 없어 허총(虛塚)을 세우고는 해마다 그날이면 거기에 가서 코방아를 찧곤 한다. 동족상잔의 여파로 찾아든 혹심한 흉년과 굶주림 속에서 그는 또한 형과 아우를 한꺼번에 잃는다. 삼형제가 한목에 장티부스를 앓다가 자기 혼자서 살아났을 때, 똑똑한 놈은 다 잡아가고 병신 쭉정이 하나만 남겼다는 마을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며 어린 마음에 그는 몸둘 바를 모른다. 어쩌면 숙명과도 같은 그의 심고(心苦)와 신고(身苦)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를 암으로 보내는가 하면 필경 참척까지 당하게 된다. 그의 데뷔작인 「天井을 보며」의 서두에 나타나 있듯이 그에게 있어 시를 쓰는 행위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서 소식 없는/ 우리 곁에서 수없이 떠나간 사람들의/ 남긴 시간을 보>는 작업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고향 마을은 이렇듯 그에게서 소중한 모든 것을 거의 앗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고향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아주 남다르다. 비록 <엊그제 내린 겨울비로 질퍽거리는/ 전라도길>에 <흐린 하늘 서쪽으로/ 시린 바람 일고/ 土酒에 취한 까마귀떼가 떠 있>는 살풍경한 땅이긴 해도 <수척한 바지랑대를 붙들고/ 다시 찾아오마>고 눈물을 뿌리며 <울타리마다 내버리듯/ 남은 인정을 널어놓고 떠나던 길> 두 흰 고무신을 새로 신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찾아간다. 묵은 쌀빚을 받으러 가는 고향길에서 본 저녁놀로 상징되는 안타까운 감정을 보자. 가해(加害)의 대상이나 다름없는 그의 고향에 대한 사랑은 사뭇 뜨겁다.

수수밭머리 낯익은
눈 녹는 모습
산기슭 들판머리로
눈 덮인 노을.
노을이여,
긴 겨울잠 속에 숨어 흐르는
검은 피를 가리고 피빛
살냄새를 가리고
횟배 앓던 유년의 어지럼증을
저 빛깔들을 거슬러 오는 동화여,
노을 비끼는 수수밭머리
들판머리로
왜 이리 들개처럼 내닫고만 싶은가.
검은 살냄새를 두르고, 외로운
짐승처럼 울고 싶은가.
나에게로 오는 휴식처럼
사랑처럼, 서러운
빛깔들처럼
서러운 묵은 빚 받으러 오는
노을이 탄다.

                「저녁놀」중에서

바로 이 점을 주목하고 싶다. 그의 문학의 요체를 나는 애정이라고 믿고 있다. 말하자면 애정의 한 걸음 전방에 바람이 있는 셈이다. 물론 그 바람은 기압 현상으로서의 그것도 포함되지만 <이쁜 짓 하는 아가야/ 바람이 인다/ 너 자라는 그늘에 바람이 인다>는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갖가지 비극과 인생고를 돌아 오는 도도한 시대의 흐름이거나 세상 풍파를 뭉뚱그리는 그런 상징물이다.

좀전에 나는 그를 괴롭히는 치질에 관해서 잠시 언급했다. 바로 그것과 결탁하여 그를 몹시 괴롭혀대는 애물단지의 하나로 치통이란 것이 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내 이빨은 못생긴 점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의 이빨 역시 내것보다 나을 게 조금도 없다. 그리고 못 생겼을 뿐만 아니라 심술 또한 대단하다. 지난번에는 좌측 상부 大兒齒가 쿡쿡 쑤시더니만 요참에는 우측 하부 소구치가 불로 지지는 듯한 아픔으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주인인 그는 잘도 견디어 낸다. 그냥 견디어내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기조차 한다. 더 이상 몸뚱이가 망가지기 전에 주인이 즐기는 술을 당분간 절제하도록 그것들이 적시에 브레이크를 걸어 주는가 해서다. 어느덧 그는 치질과 함께 치통의 아픔까지도 자신의 소중한 부분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남에게서 빚을 지는 재미로 그 빚을 갚아 주었음을 뒤늦게 알고는 그만 살맛을 잃어 자살을 기도하듯이 어느날 우리가 갑자기 그로부터 고통을 거두어 버렸을 때 그는 살아 있다는 보람을 못 느끼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기한테 몫지워진 끊임없는 고통 때문에 그만큼 충실한 인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바람 잘 날 없는 암흑의 밤을 지나면서 그는 뭔가를 그리고 누군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햇빛을 그리워하고 평화로운 잠자리에서 보드라운 맨살이나 향긋한 살냄새와 만나기를 늘 꿈꾼다. 그러나 그런 기분 좋은 일들이 엿장수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싸가지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의 진면목은 바로 그 싸가지 없는 세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강퍅한 세파가 우리들 그리움의 대상을 모조리 앗아가 버리고 고통만을 강요할 때 소극적으로 현실 도피의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한걸음 더 적극적으로 그 고통들을, 그 고통들을 강요해 오가는 가해의 대상까지도 암냥해서 수용해버린다. 그런 다음에는 또 슬그머니 달관에 가까운 거창한 폼까지 잡고 나옴으로써 이따금씩 나를 당황하게 만들곤 한다. <내 아는 세상일/ 신바닥으로 짓이기면> 세상일 쪽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 <신등으로 시린 진흙만/ 묻어 오>른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휴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 식은 난로에 불을 지피면> 마음이 더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새로 만나는 추위>까지 덤으로 감당하게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생활이 비록 <바람의/ 절망의 저 건너편에서 시작되어도/ 우리네 초라한 희로애락/ 모두 맘에 들어>하는 여유를 보일 줄 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술취하여 비 내리던 어느/ 가을밤/문득 눈에 오던> 고향집 뜨락의 소중한 모과나무를 일껏 수중에 넣고도 오래 간직하지 못하고 애무만 하다가, 그것도 왕성한 생명력으로 햇살을 향해 쭉쭉 뻗는 가지나 잎사귀꽃이 아니라 <주로 비에 젖은 등걸의/ 검은 그늘>따위나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다가 바로 그 육시랄 놈의 애정이란 것 때문에 오래 붙잡지 않고 오히려 <눈물로/ 놓아주>는 어리석음도 여반장으로 범하고 만다.

얼핏 보기에 그는 패배만을 일상으로 되풀이한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본다면 그는 다만 패배하는 척할 뿐이다. 사실은 아주 교활한 승리자인 것이다. 무자비한 가해의 대상과의 싸움에서 그는 피와 눈물과 고통까지도 몽땅 자기의 것으로 끌어들여 애정을 쏟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절망의 구렁텅이로부터 스스로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정양은 바로 이런 친구이다. 때문에 나는 「저녁놀」에서 만나는 그의 양면성을 십분 이해한다. 좁게는 고향에 대하여, 더 넓게는 조국에 대하여 그는 채권자이면서 동시에 채무자이다. <묵은 쌀빚 받으러 가는 고향길>에서 눈에 덮인 산야를 빨갛게 물들인 노을을 보며 느끼는 참담한 심경의 정양과, 다른 한편으로 가난하고 불우했던 한 시인을 향하여 <서러운 묵은 빚 받으로 오는> 딱하고도 안타까운 고향의 노을이 마치 번차례로 역할연기<役割演技>를 하듯이 동일시되는 현상은 적어도 그의 경우엔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얼마 전에 정양은 꼭 성지순례하는 투로 부부 동반하여 어딘가를 다녀왔다. 자랑스럽게도 그곳은 바로 내가 태어난 고장이다. 거기를 다녀온 다음 그는 전에 없던 버릇으로 나한테 불쑥 편지를 보내왔다. 짧은 글 속에서 나는 감격 때문에 사뭇 떨고 있는 그의 육성을 또렷이 들을 수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한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오늘 흰옷 입은 백성의 물결을 보았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가 그때 그곳에서 본 백성이 도대체 어떤 족속이며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앞으로 차츰 그의 작품 속에서 밝혀지리라 믿는다. 누구보다도 내가 그의 두 번째 시집에 기대를 걸면서 앞으로 언젠가는 만나게 될 그의 눈부신 변모를 고대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